2월의 독립운동가 김광제(金光濟)·서상돈(徐相敦) 선생

-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통한 애국 계몽활동 전개 -

경주신문 기자 / 2007년 0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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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보훈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을 통해 애국 계몽활동 전개 등 국권회복과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김광제(1866.7.1~1920.7.24)·서상돈(1850.11.10~1913.6.30)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정하였다.

 

  김광제 선생은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 1905년 동래 경무관으로 재임 중 일제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친일파 탄핵 및 부정부패 일소를 주장하는 사직 상소를 올렸다. 이로 인해 고군산도로 유배되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고, 1906년 대구로 옮겨 서상돈 선생과 함께 ‘광문사’라는 인쇄소 겸 출판사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서상돈 선생은 경북 김천에서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상업으로 큰 재산을 모았다. 독립협회가 창설되자 재무담당 간부로 활동하는 한편,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외세의 내정섭을 규탄하며 국권수호와 민권신장에 힘썼다. 독립협회가 해산되자 대구로 돌아와 광문사를 통해 애국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광제 선생과 서상돈 선생은 광문사 사장과 부사장으로 활동하며 외국의 신학문과 실학 서적을 번역, 편찬하여 근대사상을 전파하고 자주자강의식을 고취하는 계몽운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망의 위기가 과다한 국가의 빚, 즉 국채로 인한 것으로 인식하고 ‘국채보상운동’의 뜻을 갖게 되었다.

 


1907년 1월 서상돈 선생의 발의와 김광제 선생의 적극 찬동으로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올렸다. 전 국민이 금연(禁煙)한 의연금 등을 모아 국채 1,300만원을 상환함으로써 자주 독립국가를 이루자는 국채보상운동의 물결은 2월부터 전국 각지로 파급되어 한말 최대의 민족운동로 발전하였다.

 


  경술국치 이후에도 김광제 선생은 만주에 일신학교를 세워 민교육을 실시하였고, 1920년 제2의 3·1운동을 추진하여 꺾이지 않는 항일의지를 분출하였다. 나아가 조선노동대회라는 노동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민중계몽과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하다 1920년에 서거하였다.

 


  서상돈 선생은 일제의 탄압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좌절되자 사업에 전념하여 실업진흥을 통한 민족실력양성에 애쓰다 1913년 서거하였다.

 


  정부는 두 분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김광제 선생, 1999년 서상돈 선생에게 각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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