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조각 명인으로 ‘신라’창작과 재현에 평생 바쳐 신라 맥 이어

지역 최초 현대 조각가, 신라 석공의 후예 수월(水月)김만술 선생

선애경 기자 / 2016년 0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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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사정동 경주공고 뒷편으로 추정되는 작업실에서의 수월 선생.
ⓒ (주)경주신문사


“조각예술은 아이디어 창출에서부터 모티브를 가장 중요하게 느껴야 하고 사물을 관찰하는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

이번호에서는 지난 1222호, 경주출신 1세대 작가 7인 중 손일봉 선생에 이어 세 번째로 영남 지역 최초의 현대 조각가이자 신라 석공의 후예였던 수월(水月) 김만술(1911~1996)선생의 예술과 업적을 조명하며 그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흙으로 빚어 만드는 일에 열중했던 소년 김만술은 신라 석공의 후예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닐만큼 경주에서 평생을 살며 신라라는 콘텐츠로 창작과 재현을 한 조각가다.

경주 김씨로 13대 이후 경주를 지키고 있는 집안 출신으로 경주의 산증인이기도 한 선생은
말년에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흙 묻은 손에 조각도를 들고 열심히 작업을 하는 노익장을 발휘’했다고 자주 묘사됐었다.

이 기사를 구성한 모든 자료와 자문을 제공한 경주미술사 연구회 수석연구원이자 서양화가인 최용대 선생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 수월 선생이 작업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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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기념동상 제작해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 영남지역 최초, 조각 전시하기도
수월 김만술 선생은 1911년 경주시 노동동 출신으로 1930년 서울 미술학교 입학, 1942년에서 1944년까지 일본 동경 하나코 지츠조 조각연구소에서 조각을 공부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조각가로 활동했다.

1942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박군의 상’, 1944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와다나베씨의 상’을 각각 출품 입선했다. 광복 이후 1948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는 ‘소녀 두상’으로 특선했으며 1953년 제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흉상’으로 무감사 입선했다. 이후 고향인 경주에서 활동하면서 주로 기념 조형물을 많이 제작했으며 1949년부터 1951년까지 약 2년 동안은 경주예술학교 교사를 역임하며 후진 양성의 초기 교육을 담당했다.

1956년에 신라불교조각연구원을 설립해 운영하기도 했으며 대구효성여자대학교 강사를 역임했다. 1957년 미국공보원화랑에서 석고를 재료로 한 ‘불두’ 등 불상 조각과 인체 소품 등 약 20여 점으로 개인전을 개최한 것이 영남지역 최초 조각 전시로 기록되고 있다.

수많은 기념동상을 만들어 향토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7년 제6회 향토문화상 수상,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훈했다. 1972년 대구 망우 공원에 홍의 장군 곽재우 선생 동상, 1977년 김유신 장군 동상 건립, 1996년 타계할때까지 경주에서 각종 동상을 비롯해 다수의 공공조형물을 제작했다.

↑↑ 김유신 장군 동상 제작시 작업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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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미술단체 우후죽순으로 형성돼 세력 다툼할때 상관하지 않고 경주 중심으로 활동
박경숙 포항시립미술관 학예사는 ‘한국 근대미술사에서의 경주의 재발견-1세대 작가 7인을 중심으로’에서 “수월 선생의 1947년에 제작한 순수미술 작품 ‘해방’은 일제강점기 후 서구 열강에 의해 장악돼 아직 완전한 의미의 해방이 이뤄지지않은 조국의 불안정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사실주의 조각의 역동적인 힘이 느껴지는 이 작품은 일제하의 압박에서 신음하자 이제 막 억압에서 풀려난 우리 민족의 억눌렸던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자주적인 민족 염원이 강하게 표현돼 있다. 원래 석고로 제작됐으나 후에 청동으로 주조됐다. 해방후 1947년까지 각종 미술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형성돼 세력 다툼을 일삼고 있을때 김만술은 이에 상관하지 않고 경주를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했다.

영남의 구상미술에서 이추영씨는 “‘해방’은 표현양식과 주제의 특성에서 당시 한국미술계의 아카데믹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 조각 작품들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김만술은 당시의 경향과는 달리 강한 메시지와 상징성을 지닌 동적인 작품들을 주로 제작했다”고 했다.

↑↑ 1972년 홍의장군 곽재우 동상 제막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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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외 순수조각으로 분류되는 작품으로는 ‘역사(力士) I’과 ‘역사(力士) II’를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작가가 원했던 민족 통일의 염원을 잘 드러내고 있다.

높이 4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는 김만술이 후기에 주로 제작한 기념 조형물의 대표적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 두 점의 조각상은 시멘트로 제작되어 있었으나 1999년에 덕수궁미술관에서 ‘한국근대미술: 조소-근대를 보는 눈’ 전시를 계기로 청동으로 주조됐다.

선생은 주로 경주에서 활동하면서 김유신, 신사임당, 박목월, 김동리의 동상을 비롯해 경북 일대에 동상, 충혼탑, 기념조형물을 다수 제작했다. 황성공원에 있는 최초의 김유신 장군 동상은 시멘트로 조성됐으며 동남향이었다.

이후 1975년 북향의 청동상으로 재건립됐다. 1,2차 김유신 동상 제작은 모두 선생의 작품이다. 그 밖에도 보문사, 황성사, 상월사, 황룡사 등의 불상과 불국사 천왕문에 조각된 사천왕, 신사임당상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 황성공원 내 김유신 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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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남산아래 노천 조각전시장 만들어 신라 맥 잇겠다’는 소망 지녔으나...,
1993년(당시 82세) 경향신문의 ‘터줏대감’에서는 ‘매일 아침 8시면 성건동 집에서 통일전 옆 작업장까지 10년 넘게 저녁 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는 김옹은 여전히 하루에 소주 두 어병은 마셔야 ‘무슨 일’이 될만큼 정정하다. 경주 토박이인 김옹이 처음 조각에 접한 것은 경주보통학교(현 계림국교)5~6학년때의 공작시간. 이때부터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어린시절부터 2~5살 아래인 박목월, 김동리씨 등과 자주 어울렸다는 그는 3년 전부터 제일 존경하는 김동리씨의 형인 범부 씨의 흉상을 시작으로 경주 출신 예술인 20여 명에 대한 상을 만든다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적으면서 “서출지 바로 옆 논 2천여 평에 노천 전시장을 만들어 신라 맥을 이어 온 경주 예술인의 흉상을 모두 만들어 놓고 난 다음에 죽어야지” 김 옹의 소망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선생은 1990년, 개인적으로 구상중인 작품과 제작 의뢰된 작품을 불교문화의 본당인 남산아래에 야외조각 전시장을 마련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1990년(당시 80세) ‘원로 작가와의 대화’에서는 ‘경주 김씨로 13대 이후 경주를 지키고 있는 집안 출신이다’, ‘큰 작품으로만 300여 점을 제작했고 그 밖에 소규모 작품은 헤아릴 수 없다’, ‘5.16이후 충혼탑 등 기념비적인 작품을 많이 남겼고 이를 계기로 기념탑 등을 위주로 제작해 왔다’고 했으며 수월 선생은 ‘보통 하루에 3~5시간 정도는 현장에서 일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 ‘해방’, 1947년, 브론즈,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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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리, 박목월, 손일봉, 박봉수, 김범부 선생 등 경주 출신 문화예술인들 흉상 다수 제작
선생은 말년에 김동리, 박목월, 손일봉, 박봉수, 김범부 선생 등 경주 출신 문화예술인들의 흉상을 다수 제작했다. 아래 자필 에세이를 통해 흉상 제작 동기를 알 수 있다.

‘나는 천부적이라 할가 취향에 따라 한 평생 조각에 심혈을 기우려 선전 초 입선과 힘입어 여러 불상 기마상 등등 조각에 전념해 왔다. 세월의 흘음에 따라 노경에 남은 힘을 다하여 향토 인물의 평소 존경하는 문화 사랑하는 사람의 흉상을 만들어 사비로 전시하여 나의 유물을 남기고져 하오니 식(式) 후세에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앞으로 졸작이나마 관리에 일반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선생의 자필 에세이를 그대로 옮겨 적어 보았다.

↑↑ ‘박목월 인물’, 1980, 브론즈,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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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작품 더 멸실되기 전에 거푸집 원형으로 석고나 브론즈로 재현했으면”
경주미술사 연구회 수석연구원이자 서양화가인 최용대 선생은 “수월 선생은 그 시기에 조각가로서 전국에서 활동을 한 작가는 드물었다. 회화는 많았지만...,경주인이어서 경주가 뿌리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인왕상, 보살상 등 우리 신라의 석조각에 관심을 많이 가지셨다. 신라라는 콘텐츠로 창작과 재현을 하신 분이다”고 했다.

↑↑ ‘김동리 인물’, 연도미상, 브론즈,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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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문화회관 로타리 자리에 분수대 조각이 다 없어져 버렸다. 당시 작품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보인다. 현재 서라벌문화회관 내 모자상, 교육청 비천상도 선생의 작품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작품 일부는 배양골(비파 마을) 빈 집에 임시로 맡겨 놓았는데 그 집을 새로 지으면서 포크레인으로 집을 철거하던 중 선생의 작품 상당수가 파손됐었다. 여러 흉상 일부가 파손된 채 수습된 것이 있으나 이들도 온전치 않았다”며 안타까워했다.

“선생의 작품이 더 멸실되기 전에 거푸집 등의 원형으로 석고나 브론즈로 재현시킬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유존 작품의 보존관리가 시급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면서 거푸집이 다소간 남아있어서 석고를 부어 브론즈 등으로 제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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