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신라 왕릉과 고분 호석(護石)의 십이지신상(上)-통일 신라 무덤 호석에 새긴 십이지신상… 독보적 위상 지닌 수호신

선애경 기자 / 2016년 09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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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김유신묘.
ⓒ (주)경주신문사


경주지역 무덤 가운데 왕릉은 38기, 왕족·진골 귀족의 이름으로 전해오는 묘는 4기,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 8기가 전해온다. 이 외에도 왕족 및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많은 무덤군이 존재한다.

이번호에서는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돌을 이용해 만든 시설물로서 열석(列石)이라고도 하는 호석에서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먼저 전진덕여왕릉, 전김유신묘, 구정동 방형분을 중심으로)을 소개한다.

십이지상을 돌에 새겨 무덤의 호석으로 발전시킨 것은 통일신라인들로서 통일신라의 왕릉에서 십이지상을 갖춘 경우를 보면, 성덕왕릉(재위 702∼737), 경덕왕릉(재위 742∼765), 헌덕왕릉(재위 809∼826), 흥덕왕릉(재위 826∼836), 원성왕릉(괘릉, 재위 785∼798), 신라 진덕여왕릉(647∼654) 등이 있으며, 그 밖에 고분으로는 김유신묘(595∼673) 및 경주 구정동 방형분(方形墳) 등이 있다. 이 외에 능지탑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본 기사는 ‘경주 신라왕릉(2013년, 경주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발행)’과 고 이근직 교수(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의 ‘신라 왕릉 연구(2012년)’에서 인용하고 발췌했다.

↑↑ <좌>전 진덕여왕릉 십이지신석 묘상(토끼). <우>전 진덕여왕릉 십이지신석 진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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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석(護石)은?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기 위해 돌을 이용해 만든 시설물로서 열석(列石)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고구려의 경우 광개토왕릉에 보이고 있다. 백제에서는 부여 능산리 1호분과 4호분의 전변에 석축을 한 것이 보이고 있고, 신라의 경우 가장 간단한 형태로 봉토분의 저변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아가면서 비교적 큰 돌을 배열한 둘레돌의 열(列)이 태종무열왕릉에 마련돼 있다.

이와 같이 삼국시대에서는 둘레돌의 기능이 단순히 무덤의 외부를 보호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면서 이러한 기능면과 아울러 장식적인 측면이 포함돼 발전하고 있다.

즉, 왕이나 지배층의 무덤에 봉토분의 밑 부분을 돌로 쌓아올려 무덤 보호의 기능을 강화하고 있으며, 둘레돌 사이에 거의 같은 간격으로 십이지상(十二支像)을 조각한 돌을 세움으로써 무덤의 외형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 <좌측부터> 전 김유신묘 십이지신석 자상(쥐). 전 김유신묘 십이지신석 진상(용). 구정동 방형분 십이지신석 오상(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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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지신상, 돌에 새겨 무덤 호석으로 발전시킨 것은 통일신라인들 창안
십이지신상을 무덤에 배치한 것은 무덤 안을 하나의 우주로 만듦과 아울러 십이지로 하여금 무덤의 수호신 구실을 하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은 풍습은 중국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이를 돌에 새겨 무덤의 호석으로 발전시킨 것은 통일신라인들의 창안이다. 그런데 이들 통일신라 호석의 십이지신상 조각은 김유신묘를 정점으로 해 점차 그 조형감각이 퇴락해가고 있다.

따라서 9세기에 축조된 헌덕왕릉의 십이지들은 조형감각을 상실하고 단순히 줄을 새겨놓은 형태에 머무르고 있다. 이것은 당시 불교조각의 전반적 퇴락에서 비롯된 것이다. 십이지신상을 갖춘 호석은 고려시대에도 계속됐으나 단순한 석공의 그것이라고 할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특히, 고려 중기부터는 십이지신상의 모습이 신라의 신장풍(神將風)에서 문관복(文官服)을 입은 관인풍(官人風)으로 바뀌었으며 그 솜씨도 선각(線刻)의 수준으로 퇴락했다.

-8세기 중엽, 신라왕릉 호석구조에서 십이지신상으로 장엄하는 것 가능
고 이근직 교수(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는 ‘신라 왕릉 연구’에서 ‘신라 능묘 제도의 발전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시기는 제 33대 성덕왕릉이 조영되는 8세기 중엽부터 제 42대 흥덕왕릉을 거쳐 9세기 전반까지의 1세기 동안이다’고 전제하면서 ‘이 기간이 호석 구조에서의 비약적인 발달과 함께 인도 불교 문화의 수입과 당 능묘제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신라만의 독창적인 능묘제도를 완성한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봉분의 호석 구조를 장엄한 십이지신상과 이를 둘러싼 난간석을 인도 불탑 형식으로부터 받아들여 설치해 호국불교를 왕릉에서 구현했다’고 썼다.

‘십이지신상의 형식 및 양식적 변화를 중심으로 각 왕릉의 편년을 제시한 강우방의 연구 결과는 매우 주목된다’면서 ‘그는 십이지신상의 경우 통일기의 불교 조각과 마찬가지로 양식적인 측면에서는 고부조에서 저부조, 평면화로 이동하며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사실적에서 장식적 성질이 강한 형식적인 측면으로 변했다’고 했다. ‘강우방(1990, ‘통일신라 십이지신상의 양식적 고찰’)이 제시한 편년안은 ‘ ‘8세기중엽 성덕왕릉, 8세기중엽 추정신문왕릉, 8세기후반 전 김유신묘, 8세기후반 능지탑 십이지신상, 8세기 후반 구정동 방형분, 799년경 원성왕릉, 9세기초 전경덕왕릉, 826년경 헌덕왕릉, 836년경 흥덕왕릉, 9세기 후반 월성군 오류리릉’’ 이라고 인용하고 있다.

이근직 교수는 또, ‘8세기 중엽에 이르러 신라 왕릉의 호석 구조에서 면석과 탱석을 결합 시킨 뒤 십이지신상으로 장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이유는 세 가지 요소라고 밝히면서 첫째, 돌못을 사용한 새로운 공법, 둘째, 무열왕릉 이래 발달을 거듭해 온 호석의 축조 방법과 가공한 받침석의 등장과 석탑 및 건물 기단부에 면석을 결합시키는 석조 기술의 발전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돌못’이라고 했다.

↑↑ 전 진덕여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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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진덕여왕릉... 고부조에서 저부조로 변화됐고 마지막 십이지신상에 해당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에 있는 왕릉으로 사적 제24호다. ‘경주 신라왕릉(2013년, 경주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발행)’에서는 ‘구릉의 중턱에 위치한 신라 두 번째 여왕의 능으로 진덕여왕은 신라 제 28대왕으로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이다. 대외적으로 648년에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지원군을 요청하고 나당 동맹을 맺었다. 대내적으로는 국력을 튼튼히 해 삼국 통일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전진덕여왕릉은 원형봉토분으로 하단에 호석을 둘렀으며 탱석에 십이지신상을 양각해 놓았다. 탱석에는 한 개 건너 한 개에 십이지신석이 있다. 북쪽의 자상을 기준으로 각각의 방위에 십이지신상이 배열돼 12방향을 수호하고 있다. 복장은 모두 무복을 입고 있으며 양손 혹은 한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고 적었다.

이근직 교수는 ‘전진덕여왕릉의 십이지신상은 고부조에서 저부조로 변화됐으며 거의 평면에 가깝게 처리해 선각으로 조성된 것 같다. 이러한 저부조 및 평면화는 9세기 중엽으로 편년되고 있어 이 릉은 9세기 중엽 신라 왕릉임을 알 수 있다. 이후 호석 구조에서 십이지신상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 사실상 왕릉의 호석에서 확인할 수 있는 마지막 십이지신상에 해당한다. 도끼를 지물로 한 것은 전경덕왕릉을 계승한 것이다. 또 전체적으로 복장의 형식화 및 간략화가 뚜렷이 전개돼 대부분 생략되고 있다’고 했다.

↑↑ 구정동 방형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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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동 방형분...방형분 십이지신상 두드러진 특징은 좌우에 대한 여백 형성
경주시 구정동에 있으며 사적 제27호다. ‘경주 신라왕릉’에서는 ‘도굴을 당해 1920년 내부 구조가 조사됐으며 1964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고 했다.

이근직 교수는 ‘신라 왕릉 가운데 그 형태가 유일한 방형이라는 점에서 전무후무한 예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호석 구조도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탱석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도 새로운 형식이다. 호석에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는 것은 피장자가 왕임을 분명히 한다. 방형분 십이지신상의 특징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좌우에 대한 여백의 형성이다. 또 흥덕왕릉의 도상 가운데 방형분이 계승한 것은 인상, 묘상, 미상, 유상이다. 인상과 미상은 아래로 비스듬히 칼을 내리고 있으며 묘상과 유상은 도끼를 잡고 있다. 그리고 십이지신상의 도상만으로는 능지탑과 방형분의 선후 관계는 분명치 않다. 이에 대해서는 추가적으로 봉분 및 탱석의 규모 등 고고학적 상황을 검토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전 김유신묘...처음 등장한 여러 무기와 신체 표현 등은 이후 왕릉에 결정적인 영향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능선상에 위치하며 사적 제21호다. ‘경주 신라왕릉'에서는 왕릉급 고분중 대표적이다. 왕의 예를 갖춰 조성됐다. 신라 역대 귀족들의 묘 중 최대 규모의 면적에 조영됐다. 호석의 바깥 쪽으로 박석을 깔고 석난간을 둘렀다. 총 24개의 탱석 중 12개의 탱석에 십이지신상이 부조로 돼 있다.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있으며 손에는 무기를 들고 있다. 두상은 모두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이근직 교수는 ‘전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에서는 본격적으로 다양한 지물을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처음 등장한 여러 무기와 신체의 표현 등은 이후의 왕릉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허리 부분을 곡선으로 처리하던 신체의 S자형 표현은 그대로 계승되고 있으나 많이 약화된 모습이다. 또 평복이면서 두향을 모두 오른쪽으로 하고 있음은 황복사지 동쪽 왕릉의 십이지신상을 계승했다. 자상이 보주를 지물로 한 경우는 성덕왕릉, 황복사지 동편 왕릉, 전김유신묘로 십이지신상이 등장하는 초기의 세 왕릉뿐이다. 그리고 두 손을 사용하면서 각각 무기를 잡고 있는 십이지신상 및 새로운 무기가 등장한다. 결국 전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은 황복사지 동편 왕릉의 십이지신상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긴 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모색한 결과 이후의 왕릉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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