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독점 최초공개]④독립자금 댄 ‘백산무역주식회사’관련 문서와 독립운동가들이 보낸 간찰(簡札)들

민족 운동의 거점 최부자… 전 재산 담보한 ‘백산무역’ 통해 임정(臨政) 독립운동자금 전달

선애경 문화전문 기자 / 2019년 0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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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신탁주식회사 부동산관리신탁계약서’. 백산무역주식회사가 파산한 뒤 무한 입보의 책임을 진 최준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채권자인 최준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관리를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이관하게 된다.

‘백산무역’은 상해임정의  중요한 자금공급처
최부잣집이 중심세력 여러 문서 통해 증명


“조선이 독립할 수 있다는 불온한 유언비어는 조선인 사회에서 표면상 심하게 큰 일이 없는 듯하나 최근에는 궁벽한 지방 사람에 이르기까지 가정부(假政府)의 존재 내지 독립단의 활동 등을 맹신하는 형세에 있다. 선전문 2만장의 지정 배포를 시작으로 왕성하게 선전에 힘쓰도록 한다. 이를 위해 ‘유력한 내선(內鮮) 관민’의 조력을 얻어 완전한 효과를 거두고자 한다”

경상북도 제3부장(도 경찰책임자)이 1919년 경주 최부자 최준에게 보낸 3.1운동 자제 경고문 중에서 일문 별지의 일부다. 당시 일제의 탄압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이 경고문도 이번에 발견된 문서에 포함돼 있었다.

올해는 3.1운동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항일독립운동과 정신을 조명하는 뜻깊은 프로그램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지역에서는 경주 최부잣집에서 깊이 관여했던 백산무역회사 설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1920년대 백산무역은 임정수립과 함께 독립운동의 최대 자금원으로 역할한다. 최부자는 전 재산을 바치는 용단을 내려 독립운동에 헌신한다. 이러한 최부자의 결기어린 정신이 많은 문서들의 발견과 함께 당시 정황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발견된 문서들 중에선 임시정부와 긴밀하게 연계된 백산무역이 최부잣집 최준이 중심 세력이었음을 증거하는 자료들이 다수 확인됐으며 이 문서들은 그간 구전으로 전해진 독립자금조달에의 증거를 확실하게 증명해준다. 그리고 백산무역관련 인물들이 보내왔던 편지나 엽서 명함들이 다수 발견됐는데 백산무역 180명의 주주 중 안희제, 윤현태, 윤병호, 윤현진, 윤상태, 남형우 등 신년축하엽서들도 많았다. 또 박상진 서간, 김응섭, 최동희, 김지섭, 권동진, 최린, 권오설, 이상정, 송진우 등의 간찰과 신년엽서 등을 통해서는 최부자의 전국적 지명도와 인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대를 이은 최부자의 독립운동 연보를 간략히 살펴보면 11대 최부자 최현식은 1900년 의병 유세지원을 하고 1903년 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은신처를 제공하는가하면, 1907년 경주군단연회사 회장으로 국채복상운동을 주도했다. 12대 최준은 1915년 대한광복회 재무부장, 동년 경북우편마차습격기획, 1918년 대한광복회 사건으로 공주감옥 수감, 1919년 백산무역회사 사장에 취임한다. 최준의 아우 최완은 1909년 대동청년단에 가입하고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 위원과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하고 1927년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한다. 최준의 아우 최순은 백산무역회사 이사(1919년)와 상무(1921년)에 취임하고 1948년 일제고등부 경부 출신 서영출의 사주를 받은 서북청년단원에게 암살당했다.
본 기사는 경주최부자민족정신선양회에서 제공한 자료와 사진들을 바탕으로 최창호 이사의 자문을 곁들였다.

-민족 운동의 거점 교촌... 최시형, 손병희, 최동희 등 동학의 수뇌부가 드나들며 최부자와 교류하고 의병장 신돌석도 일제의 탄압 피해 장시간 식객으로 은신했다
교촌 최부잣집은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누대의 명문가의 명성에 어울리는 명망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많은 독립운동가, 학자, 사업가, 대지주들이 드나들었으며 당시 상황에 따라 친일파 거두들의 출입도 잦았다.

경주의 문중 대표들이 이곳에 모여 경주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하고 추진했다. 최시형, 손병희, 최동희 등 동학의 수뇌부가 드나들며 최부자와 교류했으며 최익현과 그의 문하생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의병 봉기를 위한 유세를 다녔다고 한다. 의병장 신돌석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장시간 식객으로 은신했다 전하며 대한광복회의 경북우편마차습격을 논의하고 탈취한 세금을 은닉한 장소도 최부잣집 사랑방이었으며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산실도 바로 이곳이었다.

수많은 독립가들이 일경의 감시를 피해 교촌에 잠입했으며 비밀리에 자금을 전달받았다. 일제는 검약과 자선으로 조선인들의 칭송을 받는 최부자를 노골적으로 탄압할 수는 없었으나 경찰을 동원해 일상적인 감시를 펼치면서 항일세력과의 연계를 철저히 차단하려 했다. 최부자 일문과 최부잣집 출입자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일상적인 사찰이 이뤄진 것.

↑↑ 1 ‘조선식산은행 근저당설정계약서’. 1922년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이 집안 전재산을 담보로 35만원을 대출받는다는 계약서. 2 백산무역회사 영업보고서. 3 부동산관리신탁계약서 표지. 4 백산무역주식회사 대차대조표. 5 아우 최윤이 최준에게 보낸 서간. 1918년 대한광복회 재무부장이었던 최준이 공주 감옥에 수감됐을 당시 옥고를 치르는 형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

-여의도 면적의 3/4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의 전 재산 담보로 백산무역회사 살린 ‘최준’...‘근저당권설정계약서’ 발견

전 재산을 바쳐 독립운동에 헌신한 경주 최부자의 청부(淸富) 정신을 발견된 문서들을 통해 짚어본다.
백산무역회사의 세 주역은 최준, 안희제, 윤상은 등이었다. 백산 안희제는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의 방침에 따라 1910년대 ‘백산상회’를 설립한다. 표면적으로는 곡물, 면포, 해산물 등을 판매하지만 실제로는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통로였다. 백산상회를 독립운동의 거점과 자금원으로 삼았던 것. 1917년 자본금 14만원의 합자회사(구성원 13명)로 전환하는데 대표는 윤현태, 안희제와 최완(최준의 아우)은 무한책임, 최준(경주 최부자 12대)과 허걸은 유한책임을 진다.

백산상회와 백산무역의 조직적 기반 즉, 참여자 대다수는 대동청년단, 조선국권회복단, 기미육영회 등의 비밀결사 조직원들이었다. 영업이익금 대부분을 독립운동 활동 자금으로 제공했으며 이로 인해 자본금마저 잠식되자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대개편하는 길을 모색한다. 1919년경 독립운동은 국내에서 해외로 무대가 전환된다.

최창호 이사는 이 대목에서 “최부자집은 임시정부 수립시 당시 인물들과 관련이 있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거의 동시에 백산무역이 출발하는 듯 보입니다”라고 했다.

1919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한 백산무역주식회사는 영남의 대지주들이 대거 출자한다. 조선인 자본으로 설립한 초유의 거대기업이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기존의 부채를 떠안고 경주 12대 최부자 최준이 사장을 맡고 안희제 등 합자회사 시기의 독립운동 동지들이 주요 임원직으로 참여한다. 백산무역은 이승만에 의해 재미동포들의 자금이 끊긴 상해임정의 가장 큰 자금 공급처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백산무역은 여러 경로로 임정의 경비 조달에 기여했으나 이로 인해 회사의 부실은 가속화된다.

이에, 1922년 2월 14일, 최준은 자신과 부친이 소유한 만석꾼 재산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대출해 추가 투입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이번에 발견된 1922년 작성된 ‘근저당권설정계약서’는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조선식산은행에서 이 집안 전재산을 담보로 해서 35만원을 대출받는 내용이 기록된 계약서였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계약 조항 8조, ‘최준이 백산무역회사와 연대해 채무 이행의 책임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다. 담보제공자, 재산 목록으로 평수, 지번 등이 나와 있고 총 785필지, 전답 66만평의 교촌집과 농지(임야 제외, 경주 710건과 울산의 62건)가 담보물권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여의도 면적의 3/4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다.

최 이사는 “300년 누대에 걸친 전재산을 한꺼번에 내놓는다는 것은 아마 상당한 고뇌가 수반됐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최준 선생의 부친인 최현식 선생의 정신도 분명히 반영되었을 겁니다”라고 했다. 또 “일본이 제시한 조선인 부호들의 재산관리 규정에 자산가로 정의된 조선 3대 부호 중 경주 최부잣집의 재산은 ‘이들의 재산은 일본의 관리를 두게 하고 재산의 처분은 관청의 허가를 득해야 한다’라고 규정돼 있었습니다. 따라서 일제의 이러한 규정을 피해 방법을 찾아 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전재산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발생시켜, 회사는 적자를 보면서도 자금을 임시정부로 전달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라고 했다.

당시 동아일보 1921년 8월 기사에선, 백산무역주식회사가 운영난에 직면하자 최준이 사유재산의 대부분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의 대출을 받아 사세 확장에 나서 서울에 지점을 신설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백산무역은 1928년 130만원이라는 거액의 부도를 내고 파산하고 만다.

↑↑ 1 일본 외무성 문건 중 일본 밀정이 보고한 내용. 최부잣집 최완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과 그 액수까지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2 12대 최부자 문파(汶坡) 최준(崔浚) 선생. 3 1920년 4월 13일자 안희제 서간. 백산무역이사 안희제가 사장 최준에게 보낸 서한. 독립운동 자금 지원으로 창립된 임원진과 일반 주주 사이의 갈등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도움을 요청한다. 4 백산무역 주주였던 남형우(사진 좌)와 윤현태가 최준에게 보낸 신년엽서.

-최부잣집이 임시정부에 독립자금 지원도 증명 돼

한편, 일본 외무성에서 보관 중인 문건 중 특히 임시정부의 구성과 관련된 움직임을 일제의 밀정이 보고한 내용이 있는데 최부잣집이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사실과 그 액수까지 구체적으로 적혀있다. 최완이 상해에 간 것을 일본 밀정이 보고한 내용에는 ‘경주 부호 최준의 아우 최완이 상해에 현금 2만원을 들고 왔다. 최완이 초기 임시정부를 탐색하고 있다. 임시정부의 사람들이 최완을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내용이 보고돼 있다. 당시 임정 총재정이 연간 6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2만원은 상당한 자금이었다. 이로써 백산무역을 통해 독립자금이 임정에 전해졌다는 이야기에 결정적 방점을 찍은 것이다.

-그 외 많은 백산무역 관련 문서들이 있으나 자료 중 몇 가지만 아래에 소개한다.
백산무역주식회사 영업보고서(부산본점 건)는 제1회 영업보고서(1919년 7월 1일~1920년 6월 30일)다. 표지 포함 11쪽으로 재산목록, 손익계산서, 재고상품명세서, 적송품 순으로 정리돼 있다. 백산무역주식회사 대차대조표는 1919년 11월 6일 백산무역주식회사의 합계잔액시산표다. 불입자본금 규모에 비해 부채와 손실이 크게 나타나있다. 이는 합자회사 백산산회의 부채 승계와 막대한 독립운동자금 지원의 결과로 추정된다. 조선신탁주식회사 부동산관리신탁계약서에서는 채권자인 조선식산은행과의 협의 끝에 최준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관리를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이관하게 된다. 백산무역주식회사가 파산한 뒤 무한 입보의 책임을 진 최준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계약기간은 1939년부터 1958년까지였다.

↑↑ 독립운동가 권오설이 보낸 엽서(위). 최준의 의식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친 김응섭의 간찰.
-의병들 편지와 항일운동가들의 편지와 엽서, 명함 등이 다수 보존, 독립운동과 관련한 인물스토리 다양해

 3.1운동 자제 경고문은 경상북도 제3부장(도 경찰책임자)이 1919년 10월 최준에게 보내온 3.1운동 자제 포고문으로 국한문판과 일문판과 일문 별지로 돼있다. ‘조선 독립은 망상에 불과하니 소요에 가담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 또는 과격단의 요구에 협조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유언비어에 현혹되지 말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이 밖에 의병들 편지와 백산무역관련 인물, 항일운동가들의 간찰들과 엽서들은 주로 최준, 최완, 최순 형제들 앞으로 온 것들이 많았다.


박상진 서간은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이 독립운동 거점인 성덕태상회의 자금 회전을 위해 대한광복회 재무부부장이자 종처남인 최준에게 20편의 대구은행 수형 어음 융통과 5천원 한도 조정을 부탁하는 편지로 박상진과 최준의 동지적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안희제 서간은 백산무역이사 안희제가 경주에 있던 사장 최준에게 부산으로 속히 와서 사태를 수습해달라고 요청한 1920년 4월 13일자 서한. 독립운동 자금 지원으로 창립된 임원진과 일반 주주 사이의 갈등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백산무역주식회사 감사와 이사가 임시주주총회를 소집해 중역불신임안을 상정하려하자 안희제가 최준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

최윤이 최준에게 보낸 서간에서는 대한광복회는 친일파를 처단하는 의협 투쟁을 벌이는 한편, 전국 부호들에게 의연금 모집 통고문을 발송한다. 이에 극도로 긴장한 일제는 1918년 대한광복회 조직원 검거에 착수한다. 재무부장이었던 최준도 체포돼 공주헌병대에서 수사 받은 뒤 공주 감옥에 수감됐다. 이 편지는 첫째 아우 최윤이 형을 면회한 뒤 1918년 6월 부친 편지로 옥고를 치르고 있는 형의 건강을 염려하는 내용이다. 최윤은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고 한다.

한편, 최준의 둘째 아우 최완은 상해로 파견돼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재무부위원으로 백산무역과 임정의 중개자로 활약했으며 일제의 간계에 속아 귀국 후 체포됐다가 석방 직후 36세로 순국한다. 셋째 아우 최순은 백산무역의 상무를 맡아 독립자금 조달에 힘썼으며 해방 후 일제 고등계 형사의 사주로 암살당한다.

김흥락 간찰에서는 김흥락이 최현식에게 보낸 문안 편지로 김흥락은 1896년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다. 이중린 간찰은 이중린이 최현식에게 보낸 문안 편지로 이중린은 안동 출신의 의병장이었다. 김석진 간찰도 역시 최현식에게 보낸 문안 편지로 김석진은 경술국치를 당하자 일본이 주는 작위를 거절하고 음독 자결한 이다.

김응섭 간찰과 엽서는 김응섭이 최준에게 보낸 안부 편지로 김응섭은 최준의 처삼촌으로 의열단원 김지섭의 일가다. 최준의 의식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조선국권회복단에선 함께 활동했다. 최동희 간찰은 10편이 있다. 당시 최동희는 동학의 제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의 아들로 손병희 선생과 함께 천도교 거물이었다.

최동희가 도쿄에서 귀향한 뒤 소식이 단절된 최완의 동정을 묻는 편지. 그는 천도교 의정회 혁신파로 활동하다 상해로 망명하고 고려혁명위원회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 고려혁명당 중앙위원등을 역임했다.

김지섭 엽서는 김지섭이 최준에게 보낸 신년엽서다. 그는 1924년 일제 황성에 폭탄을 투척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다 옥중 순국한 이다. 권동진 엽서는 충북 괴산 출신인 그가 신년연하장을 보낸 것으로 권동진은 3.1운동 33인 중 천도교 측 1인이다. 이상정 엽서도 시인 이상화의 형인 이상정이 보낸 원단엽서로 그는 광복군 창설을 지원하고 임정 의정원 의원을 지냈다. 권오설 엽서는 최준의 지원으로 대구고보에서 수학한 권오설이 보낸 것으로 그는 6.10만세운동을 주도하고 거사 직전 체포돼 옥중 순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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