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의 연원을 찾아 남쪽으로 떠난 묵헌 이태수

경주신문 기자 / 2019년 11월 14일
공유 / URL복사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묵헌(黙軒) 이태수(李泰壽,1799~1857)는 회재 이언적의 후손으로 잠계 이전인의 가학을 이어받아 평생 독락당을 지키며 선대의 가업을 계승하였다. 49세 1847년 9월 4일에 늦가을 경치를 감상하며 국노․경도 등 네 사람과 행장을 꾸려 남쪽으로 길을 떠났고, 경주-감포-울산-기장-부산-양산-언양을 거쳐 9월 25일에 경주로 돌아오는 총 22일간 700리를 유람하고 「남유일기(南遊日記)」를 지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경주 안강문화연구회 문화지 ‘비화원’19호에 게재한 적이 있다.

당시 옥산은 서얼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된 노력과 사족 간 마찰이 발생하는 등 오랫동안 난국을 맞이하였고, 결국 1884년 서얼소통이 되면서 해묵은 갈등이 완화된다. 묵헌은 『논어』 요산요수(樂山樂水)의 가르침을 통해 산수가 주는 묵묵(默默)의 의미를 이해하고 수양의 덕목으로 삼았으니, 바로 유람이 주는 의미가 그러했다.

묵헌은 유람 동안 혼반(婚班)과 사승관계에 의한 오랜 인연으로 숙박을 위해 개인 소유의 서당과 서재(鼎涑書齋·黨社浦書齋·大陽書齋 등)에서 자주 묵었고, 경유지 곳곳의 많은 서원(羅兒祠·鷗江書院·安樂書院·小魯書院·盤龜書院·白蓮亭·鰲山書院 등)을 참배하며 때로는 임진왜란 의병장의 숭고한 희생에 고개 숙이고, 선현을 모신 사당을 참배하며 공경심을 일으키는 등 도통연원의 흔적을 남겼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70여년전 묵헌이 용굴[공암(孔巖)]을 다녀가고 「남유일기」에 행적을 기록하였는데, 경주 동해바다 장진(長津)의 용굴[공암(孔巖)]을 찾아 거친 파도와 구멍으로 세찬 파도가 들이닥치는 역동적인 바다의 모습을 간결하게 묘사하는 등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서술하였으니, 「남유일기」의 특별한 가치가 담겨있다.


남유일기 中

9월 9일. 잠시 쉬면서 장진에서 물고기를 구경했다. 전동(典洞)의 허씨 서당에서 묵었다. 오늘은 중양절이다. 백주(白酒)가 갓 익어가고 국화는 아직 피지 않았다. 나는 주인과 소년 한 명과 함께 술을 사다가 마셨다. 장진 공암(孔巖)에 오르니 높다란 거북바위가 해변 가에 웅크리듯 있고, 가운데는 굴이 나 있는데 사면에 성문처럼 구멍이 났다. 고래 같은 파도가 들이닥치고 세 곳의 구멍으로 뿜어져나가는데 정말 볼만했다. 대왕암(大王巖)․이견대(利見臺)를 지나며 보았다. 족인의 정속서재(鼎涑書齋)를 방문해 찬 기운을 풀고 따뜻해진 후에야 함께 주막으로 가서 술을 사다가 마시고 작별했다. 나아사(羅兒祠)에 투숙하였다. 이날 30리를 갔다. 『墨軒實記』 卷2.

경주 전촌바닷가와 거마장 사이 해변에 용굴이 있는데, 요즘 떠오르는 핫플레이스로 아름다운 경관을 보러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지역민이라면 다 아는 곳이지만, 아직은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SNS를 통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관광객이 하나둘 늘고 있다. 지금이라도 묵헌의 「남유일기」 텍스트를 바탕으로 용굴의 콘텐츠를 만들고 해설판을 새로이 제작해 입지를 다진다면, 경주문화의 성장과 경주동해 관광산업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자문해본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