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민과 함께 걸어온 경주신문 30年史① 경주신문을 보면 경주가 보인다-1989년~1999년의 기록

이성주 기자 / 2019년 12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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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1999년 경주신문 주요 연혁

1989년 12월 15일 첫 창간호를 발행한 경주신문은 30년 동안 지역의 정치와 행정, 역사문화예술, 교육 등 각 분야에 세세한 기록을 남겼다. 특히 경주의 우수한 인적, 물적 자원 인재발굴을 주도했으며 경주시민이 지역사회에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지향하며 자치의식을 높이는 정책보도를 지속적으로 해 왔다. 또한 총선과 지방선거 때마다 정책토론회를 개최해 주민들에게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지역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 경주신문 30년 역사는 굴곡의 역사였다. 그러나 지역신문으로서 지향해야할 지역발전에 대한 소명의식은 앞으로 계속된다. 정리=이성주 기자

경주신문보도 이슈
-지방자치시대 개막
1991년 3월 26일 기초의원선거 실시, 경주시 17개 동지역 시의원 17명, 경주군 12개 읍면지역 13명(안강읍 2명) 탄생/1991년 6월 20일 광역의원(도의원)선거 실시, 경주시 3개 지구 3명(임창구, 김경오, 손경호), 경주군 3개 지구 3명(이해길, 최원병, 우영길)/1995년 6월 27일 경주시장선거 이원식 후보 당선, 백상승 후보 477표로 석패. 통합 제2대 경주시의회 박재우 의장, 이영식 부의장 체제 출범.

-태풍 글래디스 강타, 안강읍 침수, 산내면 등 대부분 지역 큰 피해 
1991년 8월 25일 동해안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글래디스로 인해 형산강 하류지역인 안강읍 소재지 일대와 농경지 등이 모두 침수되는 최악의 피해를 입었다.

-황성공원 실내체육관 설계당선작 논란
1992년 현재 모습의 경주실내체육관 설계 당선작이 발표돼 논란이 심했다. 예산과 장소, 상징성 등이 도마 위에 올랐다. 1997년 6월 황성공원 실내체육관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지역 교수들을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강하며 반발하며 ‘황성공원 살리기 발대식’을 갖고 맞섰다.

-경북도청 경주 유치전
1992년부터 공론화된 경북도청 이전과 관련 경주에 유치하자는 시민들의 열망은 대단했다. 당시 경주시민과 경주군민 보문단지 육부촌에서 ‘경주권 도청유치 범시군민 결의대회’와 세미나를 열고 대대적인 경북도청 유치에 나섰다. 당시 경주신문은 경북도청 경주유치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전문가 릴레이 지상토론을 실시했다.

-경마장 유치운동과 무산
1992년 2월 28일 경주시와 ㈜마사회가 보문단지 주변에 경마장 신설을 발표했으나 사업이 지연되며 결국 무산됐다. 경마장 부지는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된다.

-천군동 쓰레기매립장 착공
1993년 3월 난항을 겪던 광역쓰레기매립장이 착공에 들어갔다. 천군동 피막마을 일대 10만5000평 규모의 쓰레기매립장은 인근 주민들의 반발로 1년 이상을 줄다리기를 하다 마침내 공사에 들어갔다.

-경주시 시청사 군부대 부지, 황성공원 옆 이전 백지화 
1989년부터 동천동 군부대부지로 경주시 청사 이전이 추진됐다. 그러나 부대부지 매입을 두고 육군본부와 경북도 등 관련기관에 논의를 거듭했으나 경주시가 포기함으로써 1993년 10월 백지화됐다. 경주시는 당초 경주시 묘목장 일대, 황성공원 남편 및 비행장터, 동천청사 및 노동청사 확장 등의 계획을 세웠었다. 1995년 경주시가 황성공원 동편 묘목장 일대에 통합시청사를 추진했으나 1996년 지역시민사회단체와 각계인사들이 황성공원을 지켜야한다며 강하게 반발해 무산됐다. 당시 경주시의회는 경주시의 안건을 의결해 시민사회의 반발을 쌌다.

-경주시·군 통합시대
1995년 1월 1일부터 경주시와 경주군 통합행정이 시작됐다. 1월 3일 박광희 통합경주시장 취임식, 5일 서라벌문화회관에서 통합시 발족행사를 가졌다.

-최악의 가뭄, 그리고 남산산불 발생
1996년 1월부터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한 덕동댐을 비롯해 경주지역 대부분의 저수지들이 계속되는 가뭄으로 메말랐다. 경주시는 그해 1월 덕동댐 저수지는 22.8%에 불과해 제한급수에 들어갔다. 가뭄으로 인한 대형 산불도 발생했다. 1996년 3월 4일 낮 1시 20분경 충효동 뒷산에 불이나 김유신장군묘가 전소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1997년 2월 20일 낮 12시35분경 문화유적의 보고인 경주 남산에 대형 산불이 발생해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산불감시초소에서 5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주민이 폐기물을 태우다 산불로 이어졌다. 1997년 4월 28일에는 안강읍 산대1리 어래산 일대에 산불이 발생해 산불을 진압하던 경주시 공무원 박모씨가 숨지고 일부 공무원들이 부상을 당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이변과 초접전의 총선, 14대 민주당 이상두, 15대 무소속 김일윤, 임진출 당선 기염
 제14대 8.2 보궐선거 민주당 당선 고 서수종 국회의원의 안타까운 타계로 실시된 1994년 8월 2일 경주시 국회의원 보궐선거는 경주신문이 지역신문으로서는 처음으로 후보자 초청 대담토론회를 개최해 큰 반향을 불러왔다. 당시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 이상두 후보가 당선되는 이변이 연출됐다. 1996년 4.11총선에서는 기존정당의 불신 속에 무소속이 돌풍을 일으켰다. 지역에서 유리한 당시 여권이었던 신한국당 공천을 받은 갑선거구 황윤기 후보가 무소속 김일윤 후보에게, 을선거구 신한국당 백상승 후보는 임진출 무소속 후보에게 패하는 이변이 연출됐다. 경주신문은 지역신문에서는 전국 처음으로 제14대 총선 때부터 후보자초청정책토론회를 개최해 주목을 받았다.

-고속철 ‘건천-화천-내남’ 노선 결정과 백지화 논란 
1996년 6월 8일 정부는 4년 동안 논란을 벌여온 경부고속철도 경주통과노선이 도심통과노선인 정부안을 철회하고 우회노선인 새로운 제3안을 채택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1997년 1월 29일 정부는 건천읍 화천리 역사를 중심으로 화천리 노선을 결정 발표했다. 1998년 1월 김대중 대통령직 인수위원회가 경부고속철이 경주를 거치지 않고 서울~부산 직선화 계획을 결정지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경주사회는 ‘경부고속철도 경주통과노선사수 범 시민단체협의회’를 조직해 강력히 반발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출발
1997년 5월 27일 ‘98경주세계문화엑스포’ 선포식을 갖고 상징인 ‘신라천년의 미소’를 선보였다. 1998년 9월 11일 98경주세계문화엑스포가 개막돼 2개월 동안 304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오성상호신용금고 무너지고 신라백화점 부도 처리
1997년 6월 16일 경주지역 제2금융기관인 오성상호신용금고가 불법 부실대출을 과다하게 보유한 사실이 적발돼 재정경제원의 경영관리에 들어갔다. 당시 오성금고는 총자산이 40억원에 불과했으나 당시 경주상공회의소 김정수 회장에게 600억원을 불법 대출, 이중 400억원을 회수하지 못해 전격 경영관리에 들어가게 됐다. 1997년 6월 26일 경주최대의 백화점인 신라백화점이 당일 당좌거래정지로 부도처리 됐다. 신라백화점은 4억8000만원의 어음을 결재하지 못했다.

-경주시장, 경주시의회 의장 새정치국민회의 입당
1998년 6.4지방선거에서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 경주시장과 광역의원이 모두 압도적인 표로 당선됐지만 8월 21일 이원식 경주시장과 이장수 경주시의회 의장 등 8명의 시의원들이 당시 여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면서 지역 정가는 큰 파문이 일었다.

-천군동 쓰레기소각장 설치 반발 
1998년 경주시가 찬군동 광역쓰레기 매립장 내에 소각장 건설을 추진하자 인근 주민들과 환경단체들이 다이옥신 문제의 제기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특히 소각장이 보문관광단지와 인접해 있어 논란이 됐다.

-경주의 큰 별 고청 윤경렬 선생 타계

1999년 11월 30일 오후 10시 15분 20세기 마지막 신라인, 신라문화의 대명사로 존경 받던 고청 윤경렬 선생이 타계했다. 1916년 함북 주흘에서 태어난 선생은 신라문화의 아름다움에 반해 1949년 경주에 정착한 후 박물관학교 설립, 신라문화동인회 창립, 새벌향연의 밤 개최 등 많은 문화 활동을 펼쳤으며 신라이야기, 신라의 아름다움, 겨레의 땅 부처님의 땅 등 많은 저술로 신라문화를 재조명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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