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동마을 명당에 자리한 안락정(安樂亭)을 찾아서

경주신문 기자 / 2020년 0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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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강동면 양동마을로 들어가면 매표소 동쪽 산기슭에 마을을 휘감아 흐르는 안락천(安樂川)과 성주봉의 기운이 만나는 경주손씨의 강학소 안락정(安樂亭)이 있다. 영조년간 1776년에 건립된 정자는 양동의 소문난 명당(明堂)으로 빼어난 자연환경 속에서 자손들이 학문에 전념하도록 애쓴 흔적이 역력하며, 자손들에게 선대의 유업과 선비의 수신을 위해 많은 가르침을 펼쳤다.

물(勿)자 형상의 산세 가운데 성주산[문필봉] 남쪽 산기슭에 자리한 안락정은 앞으로 안락천이 곧게 흐리고, 역수(逆水)터 방간산(防奸山)이 마을의 재앙을 막고 있다. 문필봉이 학문의 기운을 보태고, 마루에 앉아 멀리 바라보면 말안장을 얹은 듯한 안장산(鞍裝山)이 우뚝하다. 꼭 풍수지리의 유리함으로 집안이 번성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도 안락정은 탁 트인 시야와 풍부한 일조량 그리고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 등은 자연의 혜택으로 여겨졌다.

정자의 이름은 안락천에서 취하였고, 또 『논어』「선진(先進)」의 “공자께서 ‘옛사람들은 예(禮)와 음악에 있어서 야인처럼 질박했으나, 후대의 사람들은 예와 음악에 있어서 군자처럼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만일 내가 마음대로 택하여 쓸 수 있다면 나는 옛사람들을 따르겠다(子曰 先進於禮樂 野人也 後進於禮樂 君子也 如用之則吾從先進)’”며 예악에 있어서 형식보다는 질박함을 따르겠다는 뜻을 따랐다.

건물 처마에 안락정 편액이 안정감 있게 자리하고, 강당에 성산재(聖山齋) 그리고 좌우에 술선당(述先堂)·사검실(師儉室)이 있다. 그리고 1918년 인동장씨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1851~1929)과 1921년 진성이씨 기암(起巖) 이중업(李中業,1863~1921) 등이 지은 기문과 설천청연(雪川晴烟)·낙강어강(洛江漁舡) 등 주변 경치를 읊조린 성산팔영(聖山八景)과 시판 등이 걸려있어 정자의 내력과 그 운치를 더해준다.

장석영은 일제 강점기 칠곡 국채보상회 회장 그리고 제2차 유림단운동 영남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유학자로, 경주의 여러 문인과 교유하며 기문을 많이 남긴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안락정기」는 동해바다를 유람하다 경주 양좌동에 들러 손씨의 정자에 들러 기문을 남겼고, 안락정의 내력을 밝히는데 소중한 기록물로 분류된다. 조선후기에 상당수의 원사정재(院祠亭齋)가 세워지면서 가문의 위상을 나타냄과 동시에 사회문제도 초래하였지만, 현재를 사는 사람들은 지난 역사를 이해하고 객관적인 정통성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안락정기
동도의 성산(聖山) 아래에 안락천이 곧게 흘러 마을을 이룬다. 중종년간에 천관태재(天官太宰) 손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고, 그 후손들은 어질고 현명하며 대대로 그 집안은 세상에 충효(忠孝)로 명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옹주(雍州)의 박옥(璞玉)은 모두 숫돌로 쓸 수 있고, 서주(徐州)의 흙거름은 모두 큰 사직단을 쌓을 수 있고, 동도의 사대부는 대개 어진 자가 많다고 말한다. 내 일찍이 동쪽으로 바닷가를 유람하며 성산(聖山)의 정자에 이르렀는데, 정자는 통정(通政) 손 공이 지었다. 안락(安樂)으로 정자의 이름을 삼았으니, 내가 편한 것에 야인(野人)들도 편안하고, 내가 즐거워하는 것에 야인들도 즐거워하며, 그 안락천의 이름에서 취하여 그 편한 것과 즐거워하는 것에 뜻을 두었다.

공은 일찍이 몸소 농사일에 힘써 집안을 제대로 이뤘고, 예악(禮樂)에 있어 꾸밈이 적고 질박함이 많아 훗날 군자처럼 형식미를 갖추었으며, 스스로의 도가 이와 같았다. 게다가 안으로는 행실이 깨끗하고 아름다우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고, 자식들에게 관대하였다. … 만년에 … 비단옷에 영화를 멀리하고 산야에 머물며 이곳 정자에서 소요하며 여생을 마쳤다. 그 마음에는 일반의 안락(安樂)을 스스로 얻었으니 어찌 비루한 촌사람이 혼자서 등따시고 배부름을 편안해하고, 혼자서 편안하고 한가로움을 즐기는 것과 같으리오. 또한 위로는 어진 조상의 세대를 이었고, 아래로는 후세에 그 규범을 남겼다.

아! 당시의 사람들이 종종 안락의 마음을 그 자손에게 남겼고, 자손은 그 선조의 덕을 실추하지 않고 또한 안락의 뜻을 숭상하였다. 성인이 이에 우려하는 보살핌이 있었던가? 편안히 살면서 가르치지 않는 자가 무릇 위태롭고, 안락에 극하면 원망한다. 진실로 능히 성인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어짊에 편안하고 그 의를 즐긴다면 장차 영원히 안락하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즐거움을 따르지 않게된다. 무릇 안락을 하는 후예와 안락의 정자에 머무는 자가 또한 힘쓰지 않으리오. 정자는 들판의 넓음과 산천의 승경이 있으니, 바라보면 즐겁고, 이 정자를 지나며 오르는 자 역시 마땅히 각자 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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