큼지막한 호주머니

경주신문 기자 / 2020년 0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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큼지막한 호주머니


                                                     윤이산


큼지막한 호주머니 달린 옷이 좋다
메모지도 넣고 돋보기도 넣고
자전거도 넣고 여행도 넣고 휘파람도 넣고
달걀 한 꾸러미 넣어두면 저들끼리 알아서
다달이 월 수익 낼 것 같은 호주머니

칸마다 용도별로 수납하면
옷 한 벌로도 한 살림 차린 것 같은
그런 호주머니 달고 걸으면
가진 것 없어도
걸음걸음 실실 콧노래 새겠다

구멍 난 줄 모르고 실속을 넣어뒀다
덜렁 흘려 버려, 이 등신 싶은 적 한두 번 아니지만
호주머니 없는 옷을 입고 나설 때는
여윳돈 바닥난 것 같아, 숨을 데가 없는 것 같아
덜렁거리는 빈손이 안절부절못한다

언 손도 텅 빈 손도
언제나 군말 없이 받아 주던
내겐 최측근이었던 호주머니

땅에 묻고 돌아선다

이젠 더 넣을 것도 꺼낼 것도 없는
아버지



-아버지, 생의 가장 큼지막한 호주머니
↑↑ 손진은 시인
극장표, 명함, 볼펜, 사탕, 몇 장의 지폐 …… 한 번씩 세탁을 위해 지난 계절에 벗어논 옷의 호주머니를 뒤지면 나오는 것들이다. 들어 있는 모든 것들이 지난 삶의 시간과 공간을 떠올리는 추억의 오브제다. 그뿐이랴. 호주머니는 불편한 손을 가리고, 언 손을 녹이는 곳이고, 먹을 것들의 곳간이다. 그래서 감히 말한다. 호주머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은 없다고.

그래서 시인의 큼지막한 호주머니에는 메모지도 돋보기도, 자전거도 여행도, 휘파람도 콧노래도 들어 있다. 사물들도 새끼치고, 나도 숨고, 구멍을 통해 다른 삶과 내통도 한다. 넓고 호젓하고 은밀하여, 나의 세계가 모조리 빨려 들어간다. 호주머니는 나의 내밀한 우주라 불러도 무방하리라.

그런데 얼핏 호주머니 예찬론을 담고 있는 듯한 전반부 와는 달리 이 시의 후반부는 반전을 지닌다. 그 호주머니가 다름 아닌 아버지라는 것이다. 그렇구나. 시적 화자는 모든 것을 군말 없이 받아주던 아버지와, 휘파람 불면서 자전거도 타고 여행도 하고 괜히 으스대고 추운 손도 녹였구나. 생각만 해도 든든해지던 그 큼지막한 호주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서는 딸의 마음! 그것은 “더 넣을 것도 꺼낼 것도 없어진”자의 캄캄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주머니 없는 옷을 평생 입어야 하는 시련을 받은 시인은 이제 자신의 가슴 밑에 호주머니 대신 평생 마르지 않는 눈물 주머니를 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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