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재의 손자 구암 이준을 만난 간재 이덕홍 선생

경주신문 기자 / 2020년 03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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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퇴계의 제자 간재(艮齋) 이덕홍(李德弘,1541~1596)은 농암 이현보의 증손으로, 일찍이 퇴계 문하에 들어가 12년간 퇴계를 모시며 학문의 요결을 익혔고, 주역질의(周易質疑)·사서질의(四書質疑)·계산기선록(溪山記善錄)·주자서절요강록(朱子書節要講錄)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567년 어느 날, 간재는 안동의 도산서원 동쪽 마루 시습재(時習齋)에서 학문을 닦고 있는데, 마침 경주 옥산에서 올라온 구암(求庵) 이준(李浚,1540~1623)을 만나 회재와 퇴계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주고받은 문답 가운데 일부가 『艮齋集』에 실려있지만, 아쉽게도 『구암유고』에는 해당 글이 실려있지 않다. 다만 족보를 따져보면 회재의 증조모와 농암의 조모가 자매 간이었으니, 서로가 인척의 관계로 주고받은 얘기는 상당히 친밀하였을 것이다.

간재는 훗날 1578년(선조 11) 7월 경주의 집경전(集慶殿) 참봉에 제수되었고, 1580년 4월 바쁜 공무에 여가를 내어 경주-감포-소봉래(小蓬萊)-포항 장기-오천-경주읍성 등 주변의 명승지를 유람하고 「동경유록(東京遊錄)」을 남겼다. 경주 시가지의 유적과 동해안 감은사·이견대·대왕암·감포·연대(煙臺) 등은 풍성한 볼거리였고, 특히 포항 장기의 소봉래[소봉대]는 회재 선생이 다녀간 공간으로 간재는 선생을 추억하며 차운시를 남겼다.

회재의 혈손 잠계(潛溪) 이전인(李全仁,1516∼1568)의 아들인 구암 이준은 조부 회재 선생을 기리기 위해 문집 서문을 받아 출간하고, 옥산서원을 건립한 인물이다. 안강의 쌍봉(雙峯) 정극후(鄭克後, 1577~1658)는 “공은 예법의 집안에서 태어나, 자식으로서 부모의 가르침을 들었다. 장성해서는 퇴계 선생의 문하를 출입하면서 선생의 성대한 덕을 밝히고 드러냈으니 손자라 할만하였다. … 공의 벼슬은 당시 임진왜란의 혼란을 당해 비분강개하여 붓을 던지고 무과에 급제하였다. 처음 경산현령이 되고, 군기시첨정을 거쳐 만경현령[전북 김제]이 되었다. 통정(通政)에 오르고 청도군수가 되었는데, 모두가 청렴하고 매사에 조심성이 많으며 백성을 사랑하여 칭송이 드러났으니, 집안의 명성을 실추시키지 않고 받아들임이 있었다. 공의 행실은 천성이 지극한 효자로, 부모 섬김에 봉양을 지극히 하고, 제사에는 풍성함과 품행을 지극히 하였다. 매일 새벽 집안 사당을 배알하며, 비바람에도 그만두지 않았고, 손님을 대접하거나 이웃 마을을 구휼할 때도 모두 기쁜 마음으로 하였다. 무릇 이와 같은 까닭에 한때의 이름난 현자와 큰 선비들 모두가 그 사람됨을 좋아하였다. 때로는 선생의 도덕을 드러내어 저술하기도 하였으니, 또한 공의 지극한 정성으로 빚어진 일이었다.”라며 1657년 「군수이공묘갈명(郡守李公墓碣銘)」을 짓고 구암공의 행적을 기렸다.

옥산서원은 1574년 사액 이후 송당 유홍(1524~1594) 󰡔송당집󰡕권1,「詩․玉山書院次盧相公韻」․여헌 장현광(1554~1637) 󰡔여헌집󰡕권2,「書․與玉山書院士林」․백사 이항복(1556~1618) 󰡔백사집󰡕권1,「詩․次李從事沿途之作」․한음 이덕형(1561~1613)등 조선의 많은 선비들이 시문을 통해 옥산서원의 존재를 공감하였고, 서원을 찾아 참배하며 학문의 도통연원을 찾았다. 간재는 회재 선생이 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 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일에 대해 매우 통한할 일이라 말하며, 편지글을 이어나간다.

-이준과의 문답. 정묘년(1567년, 명종 22) 「與李浚問答 丁卯」
내가 시습재에 홀로 머물 때 회재 이언적 선생의 서손(庶孫) 이준(李浚)이 옥산 계상(溪上)에서 도산(陶山)에 이르렀다. 나는 항상 회재 선생은 세상의 뛰어난 인재이고, 선각자이신데 참소하는 말로 인해 유배지에서 돌아가셨으니, 이는 천고의 불행이요, 이승과 저승에서 통탄할 일이라 생각하였다. 지금 성인의 밝은 시대를 만나 죄가 없다는 것이 밝게 드러났으니, 한편으로는 이 사람을 위해 축하할 일이고, 한편으로는 우리의 유도(儒道)를 위해 다행한 일이었다. 그 후손을 우연히 만나니 정이 마치 옛 벗과 같고, 마주 앉으니 얼굴이 펴지고, 나도 모르게 진심이 드러났다.

이준(李浚)이 “퇴계 선생이 누차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는데, 만약 벼슬이 더해지는 명이 있고, 옛날의 예를 회복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사양하며 무슨 뜻으로 나아가지 않았겠습니까? 하물며 군자가 학문을 닦는 것이 어찌 뜻이 없겠습니까? 맹자가 ‘어려서 배우는 것은 장성해서 그것을 실행하려는 것이다.’라 하였으니, 군자가 외진 산야 사이에 살면서 그 시대의 일에 입을 다무는 것이 어찌 그 본마음이며, 어찌 도리이겠습니까?”라 묻기에, 나는 “군자의 도는 그러하고, 맹자의 가르침은 확고합니다. 내가 보기에 우리 선생께서는 도가 있다고 자처하지 않고, 도를 행한다고 스스로 기약하지 않았으며, 항상 부족한 마음을 지키어 허물이 없는 영역을 기약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세 번이나 조정을 섬기면서 네 번이나 권간(權奸)을 만났지만, 포부를 감추고 도를 지키며 아부하거나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조정에 나아가서는 물러날 것을 도모하고, 초야에 물러나서는 나아갈 것을 생각지 않았으며, 병을 조리하고 졸렬함을 지키는 것을 자기의 분수로 삼고, 경(敬)을 지키고 의(義)를 밝히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습니다. 본원(本源)을 함양하여 오래도록 침잠하고 만족해하며, 부지런히 힘써 완상하고 즐기면서 노년이 이르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또 어느 겨를에 외물(外物)을 사모했겠습니까?”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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