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주행

경주신문 기자 / 2021년 04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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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철 교수
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
어느 걸그룹의 역주행이 세간의 화제다. 역주행이란 말은 발표 당시 인기를 얻지 못한 가수나 노래가 뒤늦게 인기를 끄는 현상을 말한다. 4년 넘게 정산(定算) 한 번 못 받은 ‘브레이브걸스’가 그 주인공이다. 유튜브에서 대박이 난 바로 그날, 꿈에도 상상 못 한 이들은 소속사 대표와 해체를 이야기할 예정이었다고. 우리는 절대 당신들을 곱게 보내줄 수 없다며 팬들이 무명 걸그룹을 시쳇말로 ‘혼쭐’ 낸 사건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이상하다. 어느 배고픈 꼬마 형제에게 따뜻한 공짜 치킨을 대접했다고 치킨집 사장님을 혼쭐 내는 나라다. 도저히 이런 사장님은 가만둬서는 안 된다고 전국에서 돈과 응원(!)으로 혼쭐을 내버린다. 치킨 사장님조차 이젠 제발 그만하시라 해도 절대 말을 안 듣는다. 하기야 유명 외국인 가수들이 내한 공연을 하면 하나같이 ‘떼창(합창의 순 우리말)’이라는 독특한 문화를 이야기한다. 가수를 불러놓고 자기들끼리 더 크게 노래 부르고 논다. 나도 노래 좀 하자고 가수가 엄살을 부리지만 듣는 척도 안 한다. 그리고는 한국 사람들은 공연 잘 봤다고 행복해하더란다. 정말 희한하다. 한국인들의 떼창 문화는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다.

어쨌든, 걸그룹 역주행 해프닝의 주체는 로맨틱하게도 예비역 병장들이다. 어느 유튜버가 ‘브레이브걸스 롤린 댓글 모음’ 영상(조회수 1,600만 이상)을 올렸다. 시작은 언제나 이렇게 평범하고 사소하다. 그들 공연이나 방송 장면을 편집한 영상인데 댓글이 재미나다. “전쟁 때 이거 틀어주면 전쟁 이김”, “인민군도 신나서 흔들 어제 낌”, “ㅋㅋㅋ 통일되겠네ㅋㅋ” 군인들이 썼을 법한 댓글들이다. 감동적인 것은 “(본인은) 18군번인데 16군번들한테 (이 곡을) 인수인계받고, 전역할 때 20군번들한테 인수인계해줌” 류의 댓글이다.

선임한테 인수인계받을 정도의 곡이라면 이건 뭐 거의 군가(軍歌) 아닌가! 불러주면 어느 부대이건 달려가 최선을 다해 춤과 노래로 군장병을 응원하던 브레이브걸스를 강제 소환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다.

이 시점에 생뚱맞지만, 불교 경전에 우리가 사는 사바세계에 부처로 태어날 보살(菩薩, 부처의 전신(前身))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석가족 혈통과 국토 및 부모가 될 사람들을 자세히 관찰한 다음, “정반왕이 다스리는 카필라 왕국의 마야왕비 태에 들 것이다.”라고 선언하는 대목이다. 쉽게 말해 부모가 자식을 낳는 게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선택한다는 내용이다. 불교식 태교론(胎敎論)이다. 이게 맞는다면 이제 새 가정을 계획하는 신혼부부들은 특히나 공을 들여야겠다. 와인과 꽃 등 로맨틱한 분위기도 중요하지만, 예쁘고 건강한 아기가 우리에게 와주십사 더 운동하고 좋은 책과 건강한 음식을 가까이해야 한다. 아기에게 선택받으려면 말이다.

시간은 한쪽 방향으로만 흘러가는 게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게 평면적이지가 않다. 트로트가 대중의 인기를 끌자 〈막걸리 한 잔〉이란 멋진 과거가 더욱 세련된 현재로 탈바꿈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아기 부처의 역주행(?)으로 시작된 불교는 선(禪) 불교로 꽃을 피운다. ‘바로 지금, 바로 여기’를 주장하는 선불교에 따르면 과거는 없다. 왜냐하면 과거는 지금, 여기서 추억되기 때문이다. 미래도 없다고 한다. 미래도 지금 여기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가령 이번 주 토요일 발표될 로또 영수증을 만지작거리며 ‘1등이 되면 차부터 바꿔야지... 빨간 스포츠카가 좋겠지?’ 상상만으로도 기쁘다. 미래의 일인데 지금 내 입꼬리가 활짝 올라간다. 지금, 이렇게 말이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 덩어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인식 내용이란 이야기다. 걸그룹의 역주행은 당연하고 상식적이란 말을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게 해 봤다.

곱씹어볼 대목은, 춥고 덥지만 불러주는 군부대라면 어디든 최선을 다한 그들의 프로정신이다. 심지 굳은 팬심은 또 어떻고. 20대가 대세인 요즘 세상에 평균 연령 30세가 넘는 아이돌 그룹이라면 핸디캡이 아닐 수 없지만, 그들을 지켜왔던 팬들에겐 말뚝(!) 신심의 절대 시간이기도 하다. 현재는 과거 행위의 결과이지만, 현재는 미래 결과의 원인이기도 하다. 현재에 지난 결과와 새로운 원인이 동시에 들어 있다. 평범한 일상이 결코 그렇지 않음을 느끼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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