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주인과 함께 21세기의 르네상스를

경주신문 기자 / 2021년 05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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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기현
경주문화재단 대표
“경주에 온지 30년이 지났습니다만 아직도 외지인 취급 받습니다. 적어도 3대가 살아야 경주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곧 정년을 앞둔 원로 대학교수의 푸념(?)이다. 경주에서 반평생을 살면서 인재양성과 지역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하지만 경주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외지인으로 여긴다.

경주에는 여전히 신라시대 귀족계급이 존재한다. 조상 대대로 경주에서 살아오고, 경주에서 태어나서 경주에서 초중고를 졸업하면 ‘현대판’ 진골귀족이다. 여기다가 경주에 본을 둔 성씨이면 한 등급 높은 성골귀족이다. 외지에서 태어나서 경주에서 초중고 중 어느 하나를 졸업하면 아마 6두품 정도 될 것 같다.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 아무리 실력을 갖추어도 귀족은커녕 경주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경주사람 대접’이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겠지만, 경주에서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경주사람’되는 것이 필수 요건이다. 경주사람 대접을 못 받으면 사업, 인사, 사교 등에서 실질적인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외지인들은 경주에 신라시대 골품제도가 아직 존재한다는 주장에 심정적 동의를 할 것으로 믿는다.

경주의 뿌리는 신라이다. 그런데 정작 신라는 무척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나라였다. 고조선의 유이민 세력인 사로6촌이 합심해서 도래인인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얼마 뒤 그들은 해양세력인 석탈해를 받아들이고, 북방세력인 김씨와 연합해서 영역을 확장하고 문화를 발전 시켜 나갔다. 가야출신인 김유신을 적극 등용한 신라가 한반도의 패자가 된 것은 명분 보다는 실리를 앞세운 지도층의 열린 사고 덕분이었다. 국제정세와 시대흐름을 수용한 유연한 대당외교는 신라를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우뚝 서게 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인근에서 제작된 로만글라스가 신라귀족들의 애용품이 되고, 사라센 상인인 처용이 신라에 머물러 살 수 있었던 것도 신라인의 포용성을 보여준다. ‘개방’, ‘포용’, ‘융화’야말로 신라문화의 핵심사상이다. 이런 신라인의 후손이자 신라문화의 계승자라는 경주가 오늘날 배타성과 보수성으로 특징 지워진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국정보고용원에서 조사한 ‘인구소멸위험지수’에 따르면 경주시는 현재 인구소멸 ‘위험’지역에 포함된다. 안정, 양호, 주의, 위험, 위기의 다섯 단계 중 네 번째 단계이다. 자칫 잘못하면 인구소멸로 사라질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인구소멸을 막기 위해서는 지역 젊은이들을 떠나지 않게 하고, 도시 젊은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인구소멸 위기를 눈앞에 둔 지자체들은 젊은이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고 주거안정을 위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지역여건에 맞는 맞춤형 복지혜택을 제공하는 지자체도 있다. 인구소멸을 위해 가히 필사적이다. 경주시도 인구증가프로젝트를 수립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그런데 경주는 도시 브랜드를 활용하면 예상외로 쉬운 해답을 얻는다. 천년문화도시 경주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의 마음의 고향이다. 한 번 살아보고 싶은 도시를 꼽는다면 제주와 함께 으레 경주가 포함된다. 대구가 고향인 강석경 작가는 ‘고향이란 육신이 태어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장소’라면서, 경주를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고향으로 택했다. 실제로 경주가 좋아서 경주에 터를 잡은 예술가와 학자들이 적지 않다. 박대성 화백, 주보돈 교수, 강석근 행복학교장, 이재호 기행작가, 키덜트뮤지엄 김동일 관장, 곽진규 기타리스트... 경주를 영혼의 장소로 택한 ‘신경주인’들의 이름으로 한 페이지를 다 매울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들은 예외 없이 아쉬움을 호소한다. 경주의 배타성이 외지인들의 진입을 가로 막는다는 것이다. 영혼의 고향을 좇아 온 사람들에게 육신의 고향을 강요하고, 산 자와 죽은 자가 조우하는 장대한 역사의 공간에서 협소한 인맥을 따지며 욕망의 담을 쌓기도 한다. 고장의 브랜드를 빛내줄 보석 같은 자원들이 텃새 때문에 상처를 받고, 심지어 짐을 싸서 떠나는 경우도 있다.

문화예술 같은 ‘소프트파워’가 도시와 국가의 경쟁력이 된지 이미 오래다. 경주가 좋아서 찾아오는 ‘신경주인’을 따뜻하게 맞아주면, 신라가 그랬던 것처럼 경주는 문화예술의 메카가 될 수 있다. 콘텐츠가 풍부한 알토란같은 전입자들로 인해서 인구증가는 덤으로 얻는다. 경주에서 21세기 르네상스를 재현하는 일, 그렇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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