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놀이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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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놀이



                                 김보나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 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 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아지는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세계는

누군가 눈을 뜨기 전에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뮤렌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친구는 이것을 선물하면서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거나
유품 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 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 본다



-상자라는 이름의 폐허 혹은 죽음
↑↑ 손진은 시인
택배 상자보다 더 팬데믹 시대를 설명하는 기호가 있을까? 사람들은 나가기를 꺼리고 필요한 물품은 손쉽게 택배를 신청한다. 방에는 뜯지 않은 상자가 쌓여간다. 심심해지면 그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는 놀이를 즐긴다. 오래된 상자 속 내용물들은 어둠 속에서 주인을 만나려 더 이상 설레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계는 내용물이 눈을 뜨기도 전에 빛으로 눈꺼풀을 막아버리기 때문이다. 상자 속 내용물들은 울니트처럼 반쯤은 시효를 상실했다. 그래도 나는 아직은 상자를 열어보며 즐거워하기로 한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심으며, 친구가 보낸 뮤렌베키아 그 휘어진 방향을 따라가는 굴광성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한다. 그러나 날마다 쌓여가는 상자들은 이삿짐 같다가 유품으로 변해버린다. 유품이라는 말 속에는 섬뜩함이 있다. 그것은 폐허이거나 생명의 죽음을 담보로 하기 때문이다. 이제 세계는 죽음이 남긴 유품으로 가득해지리라. 빈 상자가 늘어가면 내가 앉아 있는 이 방도 상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내가 그 속에 담긴 거대한 상자,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상자놀이’를 통해 폐허가 되어가는 이 시대를 능청스럽게 짚는 아픈 시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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