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동호에 잠겨있는 고선사지(2)

고선사지 삼층석탑 등은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기었다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2022년 01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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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선사지 삼층석탑(좌), 고선사지에서 출토된 석재(중 상), 와당(중 하)서당화상 비편(우)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고선사지는 덕동호 서편에 있었던 사찰이다. 일제강점기인 1913-1914년에 일본학자들에 의해 이 사지에 대한 발굴조사가 있었으나 남겨진 기록이 없다. 특히 사리장치 등이 이때 없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후 경주고도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덕동댐이 건설되면서 수몰되기 전, 사지를 발굴하여 금당, 강당, 중문, 회랑지 등을 확인하고 비신이 없어진 귀부를 비롯해서 건물 초석, 건물 부재인 기와, 전돌 등 유물들을 수습한 후. 삼층석탑, 귀부와 초석 등은 국립경주박물관 신라미술관 남쪽 야외로 옮겼다.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2층으로 된 기단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 시기 석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탑의 높이는 9m이지만 옮기면서 높이가 조금 더 높아져서 현재 높이는 10.2m다.

1층의 몸돌을 크고 높게 해놓은 것에 비하여 다른 층이나 기단의 높이는 낮아서 약간 둔한 느낌이지만, 일단 자체 크기가 상당한 거탑이라 장중한 인상을 준다. 이 탑은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형태인 위로 올라갈수록 몸돌과 지붕돌의 크기가 차츰 줄어드는 양상에 충실하여 안정감이 있다. 본 석탑의 각 층 몸돌의 양쪽에는 모서리기둥[우주(隅柱)]을 양각으로 새겨놨으며, 지붕돌[옥개석(屋蓋石)]들의 아래로는 5단의 받침이 있다. 1층의 몸돌은 8개의 돌로 짜 맞추었다. 특이한 점은 통일신라 초기에서 중기 사이의 석탑에선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제외하면 대개 별다른 장식이 없는데, 이 탑은 특이하게도 1층 몸돌의 4면에서 문 모양의 장식[문비(門扉)]이 있다. 이 장식은 테두리를 2단으로 음각하여 문의 모양을 나타내어 감실을 표현하려 한 것이다. 또한 문 모양 가운데에 원형으로 된 흔적 2개가 발견되는데 이는 문고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문 모양 장식의 내부 상하 모서리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문 위에 덧씌우는 장식을 붙이기 위해 뚫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2층의 몸돌은 4개의 돌로 조립한 것으로 네 모서리의 우주를 제외하면 특별한 장식은 없다. 1층, 2층, 3층의 지붕돌들도 모두 8개의 돌로 짜 맞춘 것으로 각 층마다 크기는 다르나 형태는 모두 같으며 가운데에 연결선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3층의 몸돌은 1, 2층과는 달리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다만 네 모서리에 우주가 있는 것은 다른 층의 몸돌과 같다. 3층의 몸돌을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은 다른 층들에 비해 크기가 작고 또 탑에 모실 사리장엄구를 넣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앙화(仰花)가 남아 있고, 찰주(擦柱)는 없다.

이 석탑의 건립 연대는 명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양식을 보인다. 제작 양식이 감은사지 석탑들에 바로 이은 통일신라시대 초기 석탑 형태라는 점과 기존에 고선사터에서 발견된 서당화상비에 드러난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신라 신문왕 6) 경에 탑을 세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고선사가 앞선 가람배치인 ‘1탑 1금당’ 구조이고 감은사는 후행 가람배치 형태인 ‘쌍탑 1금당’ 구조라는 점을 들어 고선사탑이 시기적으로 조금 더 앞선 것으로 보기도 하나,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고선사는 금당 구역과 탑 구역이 나란한 형태를 가진 국내 유일의 사찰이다. 동쪽의 금당 구역은 금당을 중심으로 앞에는 중문, 뒤에는 강당이 자리 잡았고 사방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었다. 탑 구역은 금당 구역보다 규모는 작지만 역시 회랑을 두른 모습이었다. 이런 구조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연구도 있다. 금당 구역을 먼저 짓고, 석탑이 필요해지면서 구역을 추가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고선사터에는 삼층석탑 이외에도 귀부와 석등 대석, 주춧돌과 장대석이 대거 남아 있었다. 이것들도 모두 경주박물관으로 옮겼다. 하지만 가람 구조와 관계없이 무의미한 모습으로 놓여 있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이곳 고선사에서 또 하나 주목해야 될 것은 이 절에 주석했던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편의 발견이다. 현재 이 비편은 경주박물관이 아랫부분을, 동국대박물관이 윗부분을 소장하고 있다. 비석에는 원효의 출생, 수학, 저술, 교화, 입적, 추모의 내용이 순서대로 적혀 있다. 유성이 몸으로 들어오는 태몽과 태어날 때 오색구름이 자욱했다는 대목은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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