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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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지

                            
                                   박라연


허탈할 때
뭔가 가득 찰 때도 들어갑니다

따뜻하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하죠
섭섭한 대로 봉할 수 있어서 다시
풀 수 있어서 늘 희망적입니다

​얼굴이 없으면 싶을 때도 들어갑니다
우리 나중에 봐요,라는 공간을 선물합니다

​귀함을 넣어 좋은 이에게 배달하거나
처마에 매달아둘 때 세상은 더욱 눈부시죠

​세상이 사라져버렸음 싶은 이유들이 한꺼번에
울 때 그 울음을 싸서 감아주는 이름입니다
울음소리에 놀란 산과 하늘과 바다도
도리없이 들어갑니다

​당신도 상처 몇됫박쯤 잘 싸서 넣어보세요
어둠을 곱씹으며 아물던 상처가
봄의 입구 쪽으로 귀를 놓을 것입니다



-몽상과 치유의 거소, 봉지
↑↑ 손진은 시인
봉지(封紙)는 말 그대로 “종이나 비닐로 물건을 담을 수 있게 만든 주머니”이다. 그러나 그 흔하디 흔한 ‘봉지’가 한 편의 시 속에서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 몽상과 치유의 숨결로 이루어진 공간인가를 알게 한다. 그렇다. 봉(封), 하고 발음할 때 그 말은 얼마나 아늑한 부피의 숨결을 가지는가. 허탈과 충만이 다 봉지에 들어갈 이유(“허탈할 때/뭔가 가득 찰 때도 들어갑니다”)가 된다. 전자가 피신과 치유의 공간이라면 후자는 몽상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따뜻하기도 하고 서늘하기도” 한 거기에는 고즈넉한 닫힘이 끝나면 언제든 열림(“다시/풀 수 있어서 늘 희망적입니다”. “우리 나중에 봐요,라는 공간”)을 예비하는 넉넉함이 있다. 그만큼 봉지는 내밀함의 공간이며 누구에게는 열리지 않는 거소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굳이 자물쇠와 열쇠로 닫고 열 필요는 없다.

자괴의 순간(“​얼굴이 없으면 싶을 때”)에도 우리는 그 속에 들어가 은신하며 숨을 돌린다.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비밀이 들어갈 때 봉지는 신비롭다. 거기에는 셀 수도 없는 많은 꿈들이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때로 봉지는 가늠할 수 없는 값어치(“귀함”)를 넣어 좋은 이에게로 배달되기도 한다. 무엇보다 비밀이 들어간 봉지의 신비는 “처마에 매달아둘 때 세상”을 눈부시게 한다.봉지의 기능과 몽상이 최대치로 발휘되는 순간은 “세상이 사라져버렸음 싶은 이유들이 한꺼번에 울 때” 천지에서 가장 격렬한 슬픔에서 터져나오는 그 울음을 감아주는 것에 있다. 놀라워라. 그 때 “울음소리에 놀란 산과 하늘과 바다도/도리없이 들어”가 슬픔의 격류에 휩쓸린 자아를 위무한다는 것. 봉지는 우주를 껴안아 응축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작은 봉지에 대자연이 따라 들어와 치유에 동참한다. 어느 경우이든 닫힌 봉지에는 열린 봉지보다 더 많은 것들이 들어 있다. 하여 시인은 넌지시 우리에게 건넨다. 

“당신도 상처 몇됫박쯤 잘 싸서 넣어보”라고. 그 숨결에 쌓여 있으면 상처도 “봄의 입구 쪽으로 귀를 놓”고, 우리를 세상의 질서 속으로 흐르게 한다고.

봉지의 기능과 비밀의 심리학이 상동관계가 있다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기쁨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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