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확정 요새’, 놀라운 빛의 향연이 펼쳐지다

윤겸 작가, 성수동 앵포르멜에서 30일까지 전시

박근영 기자 / 2023년 0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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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작품을 설명하는 윤겸 작가.

명작은 노력의 산물일까 아니면 천재적인 감각의 표현일까? 위대한 작품들을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물음이다. 또 한편으로 작가들이 자신만의 명작을 탄생시킬 때는 자신의 의지보다 마음 가는 대로, 손이 움직이는 대로 어떤 영감이 자신을 인도하는 대로 따라갔을 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지난 7일부터 30일까지 성수동 갤러리 앵포르멜 2층에서 열리는 경주출신 윤겸 작가의 개인전 ‘미확정 요새’는 윤겸 작가의 치열하고 놀라운 작품 세계를 만날 수 있는 전시회다.


‘미확정 요새’라는 이름의 전시회답게 요새라고 불릴 만큼 자신감 있고 탄탄한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도 그의 작품 세계가 이 정도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더 큰 잠재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늠하게 된다.


↑↑ 엄마의 꽃밭 각91x91 oil on canvas.


사고로 눈 다친 후유증이 자신만의 작품 계기, 불안감 떨치기 위한 노동집약적 작품으로 이어져

윤겸 작가의 작품은 사진들에서 보듯 무수한 선의 반복으로 구성된다. 화면 가득 융모를 확대하듯 반복해서 그리고 그 위에 감각적으로 변화하는 오묘한 색을 입혔다. 작품의 크기에 따라 이렇게 반복적으로 그린 융모형의 돌기들이 수천 개에서 수만 개에 이른다. 이런 작업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게 고도의 집중과 끈기, 무서운 열정이 작품에서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제가 왼쪽 눈을 크게 다쳐 그 후유증으로 빛의 잔상현상을 오래 겪었습니다. 그때 제 눈에 보였던 빛의 현상을 작품으로 그리면서 저의 고유한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반복적인 작업은 어떤 불안감을 떨치기 위한 노동집약적 행위로 이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무수한 반복이 힘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오히려 이 작업을 하는 동안이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작업하다 보면 무의식 속에서 저를 잊고 작품에 빠져들곤 합니다. 이런 몰입감 속에서 새로운 작품이 나오기도 하고요. 다만 눈이 쉬 피로해져 그에 따른 체력적인 어려움을 겪는 정도지요”


윤겸 작가의 작품은 무수한 미세곡선이 섬세하게 변화하는 색과 조화를 이루며 그 면면이 점점 빛으로 승화하는가 싶다가 다시 면면들이 어떤 종합적인 조화를 이루며 작품의 이름에 맞는 빛을 발산하는 모습이다.


특히 ‘열꽃’이라는 작품을 마주하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따듯해지는 듯하다가 기분 좋은 열기에 휩싸이는 체험을 하게 된다. 화면의 밖에서부터 가운데로 갈수록 점점 환해져서 중심부에선 은은한 태양이 이글거리듯 표현한 정열적인 작품이다. 미술 작품이 심리적 안정과 치유를 준다는 의학계의 많은 증명들은 바로 이런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저 역시 최대한 밝게 표현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작품을 감상하신 관객분들의 마음이 따듯해졌다고 말씀하신다면 저에게는 정말 고마운 찬사입니다”


이번에 출품된 작품들은 자연과 계절의 변화를 고루 담은 특징을 가지고도 있다. 깊고 고요한 적막이 깃든 밤, 동트는 새벽 바다와 완만하게 펼쳐지는 먼 산과 숲. 아름답게 펼쳐진 별밤 등 윤겸 작가에게 비친 자연이 예의 오묘한 선과 색으로 치밀하게 묘사되었다.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자연들이 예의 섬세한 융모들의 조화로만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윤겸 작가의 말처럼 일부러 의도해서라기보다 마음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붓을 맡긴 결과라는 말이 더욱 실감난다. 그 조화들이 어울려 산이 되고 바다가 되고 밤과 새벽, 숲이 되는 결과는 신선하고 놀랍다. 여기서 다시 한번 윤겸 작가의 ‘요새’에 대한 설명이 부각된다.


↑↑ 열꽃 100x100 oil on canvas


자연과 시간이 오묘한 선과 색으로 묘사되어 거대한 빛으로 승화, ‘미확정 요새’ 아닌 크게 펼져진 ‘확정 요새’!!

“요새는 단단하게 저를 지키기 위한 공간인 동시에 이상향에 도달하고 싶은 중요한 목표지점입니다. 반복되는 삶의 과정에서 일정한 크기의 모양과 각자만의 개성들이 묻어나오는 형상들, 동일한 패턴들을 만들어 나가는데 그게 모두 존재를 위한 최적의 방법이지요!”


다시 말해 윤겸 작가의 화면에 구현된 그 많은 융모들은 윤겸 작가의 눈에 비친 각각의 자연과 시간들이 존재하기 위해 발산하는 하나하나의 자기표현인 셈이다. 그 변화하는 요새라는 이름의 공간에 펼쳐졌으되 변화하는 자연과 성장하는 윤겸 작가의 작품세계는 확정적이지 않으니 ‘미확정 요새’라는 타이틀이 이처럼 실감나는 것이다.


작품 중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윤겸 작가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만든 작품으로 ‘엄마의 정원’이란 제목이 붙은 연작이다. 안타깝게도 윤겸 작가의 어머니 역시 한쪽눈에 장애를 가진 시각장애인이다. 어머니의 정원 역시 매우 밝고 화사한 빛이 풍요롭다. 전시 작품 중에는 ‘엄마의 의안’이라는 소묘 작품도 있었다.


“어머니께서 제가 눈 다쳤을 때 무척 상심하셨습니다. 그때 아팠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이 작품을 그렸습니다”


문득 윤겸 작가의 어머니께서 이 작품을 보신다면 불편한 눈뿐 아니라 마음까지 환해지지 않을까? 적어도 윤겸 작가의 어머니에게만큼은 세상 그 어떤 꽃밭보다 아름다울 것이다.


↑↑ green fortress 91x91 oil on canvas.

윤겸 작가는 경주 황성동과 황오동에서 자랐고 유림초를 다녔다. 이때부터 이미 그림 그리기는 가장 즐거운 활동으로 자리잡았다. 어린 시절 가세가 기울며 현곡면 내태리로 이사했다가 가족 전부가 삶을 위해 대구로 이사하면서 대구대 미술대학을 나오기까지 쭉 대구에서 성장했다. 대학졸업 후에는 경기도 파주시에서 실행하는 미술인 지원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공모해 합격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로 진출했다. 어려운 여건 상 전업작가로만 생활할 수 없어 미술학원 강사를 비롯한 각종 아르바이트로 삶을 꾸려오다 일 년 반 전부터 뜻을 굳히고 보광동 작업실에서 작품에만 열중해왔다. 이번 전시회 출품작들은 윤겸 작가가 한 해 반 동안의 혼신을 다한 사투가 녹아 있는 셈이다. 그런 그에게 경주에 대한 감회를 물었다.


“경주는 제 미술의 기초가 시작된 곳입니다. 어릴 때 황성동 황오동 살면서 그 근처 유적지들을 늘 보면서 자랐거든요. 아버지랑 함께 남산과 보문단지도 자주 다녔고요. 그런 게 제 마음속에 꾸준히 쌓여서 작품 활동에도 보이지 않은 자양분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위대한 작품을 만드는데 천재성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영감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노력에 관해서라면 윤겸 작가는 그 어떤 작가들보다 치열하고 고집스런 노력형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올해 나이 35세로 미술인으로는 어쩌면 이제 본격 시작이라고 해야 할 윤겸 작가이지만 이미 연륜을 뛰어넘어 분명하고 개성 넘치는 작품으로 ‘빛의 향연’을 구현하는 만큼 그의 작품 활동은 이제부터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 믿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윤겸 작가의 ‘미확정 요새’는 미확정이 아니라 더 크게, 활짝 펼쳐진 ‘확정의 요새’라 해도 손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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