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으로 보는 경주 과거 ‘추억과 향수 소환’[5]

이상욱 기자 / 2023년 06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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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경주여자 보통학교 양잠 사육 모습 1930년대 경주여자 보통학교 생도들이 양잠 사육을 하고 있는 장면. 머리를 길게 땋은 여학생들이 어린 손으로 누에를 치고 있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모내기 풍경 1930년대 경주읍. 줄을 대고 한 줄로 서서 모내기를 하는 농민들의 모습에서 땅과 곡식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모내기를 돕는 어린아이와 논둑에 앉아 이야기하는 노인의 모습이 정겹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무열왕릉 앞 돌거북의 1930년대 사진 무열왕릉 앞 왼쪽에 있는 비신을 잃은 돌거북과 이수. 사진은 1930년대 것으로 국보 제25호인 무열왕릉비의 돌거북이 머리를 번쩍 치켜들고 기운차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수 앞쪽 중앙에 ‘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여덟글자가 있어 碑身(비신) 없이도 무열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글씨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것이라 전한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계림 첨성대와 반월성 사이의 숲으로 60여년 전(1993년 기준)의 풍경에서도 지금처럼 고목이 울창하다. 김알지의 탄생설화로 유명한 이곳은 현재 사적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경주박물관 1930년대 박물관의 전경. 당시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불리던 이곳은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신라시대의 유물·유적을 보존·전시하고 있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서악서원 전경 1930년대 서악서원의 전경. 이 서원은 김유신, 설총, 최치원 三賢(삼현)의 위패를 모셔놓은 곳으로 退溪(퇴계)가 西岳精舍(서악정사)라 이름 지어 손수 쓴 글씨를 이 서원 안에 걸었다한다. 임진왜란으로 선조 33년에 중건되었고, 인조 원년에 서악서원이라 사액받게 되었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강서면 안강리의 日浦苗圃 1930년대 강서면 안강리의 日浦苗圃(일포묘포). 2000평에 가까운 면적에 林業(임업)을 위한 작물이 심어져 있다. 

↑↑ 자료제공: 서울 아리재 주인 최덕환
1930년대 포석정 1930년대 포석정. 신라 때 만들어진 삼체석불 북쪽에 있는 이궁 터로 현재 사적 제1호로 지정돼있다. 경애왕 4년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주연을 즐기고 있던 왕을 비롯한 수 많은 신하들이 죽음을 당한 곳으로 지금은 곡선을 이루어 돌아가는 돌홈만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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