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부윤 오시복과 이형상이 제주도에서 만나다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12월 07일
공유 / URL복사
↑↑ 오상욱 시민전문기자
경북고전번역연구원장
동복(同福)오씨 휴곡(休谷) 오시복(吳始復,1637~1716)은 우참찬 오억령(吳億齡)의 증손으로, 조부는 오정(吳靖), 부친은 오정규(吳挺奎), 모친은 이여황(李如璜)의 따님이다. 오억령은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고 임진왜란을 예감하였으며 선조를 호위한 인물로 충신이었다.

오시복은 현종 3년 1662년에 증광문과 병과에 급제해 수찬(修撰)·정언(正言)·지평(持平)·교리(校理)·이조정랑 등을 두루 지냈고, 강릉부사를 역임하였다.

1680년 4월 16일 사헌부에서 “평안감사 유하익(俞夏益)은 허적(許積:당시 남인의 영수)의 문객으로 분주하게 심부름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고, 평양감사를 맡아서는 정령(政令)과 거조(擧措)가 해괴한 일이 많았으며, 탐욕스럽고 음란하고 방종한 행동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강릉부사 오시복은 본래 어리석고 용렬하고 더러운 인간인데, 허적의 집에 아부하여 역적 허견(許堅:허적의 아들)과 절친하게 지내며 종처럼 분주하게 왕래하는 꼴을 온 세상이 침 뱉고 욕하였습니다. 유하익·오시복을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합니다”라 아뢰었다. 이 일로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당해 파직되었다가 1689년 소의장씨(昭儀張氏:장희빈) 소생을 원자로 정호(定號)하는 문제를 계기로 서인이 축출되는 기사환국으로 복직되어 이조참판·호조판서 등에 올랐다.

1688년 11월부터 1689년 3월까지는 경주부윤의 중책을 맡아 짧은 임기를 지냈다. 임기가 짧아 뚜렷한 업적을 남기지는 못하였지만, 그는 한석봉 천자문의 서문을 적을 만큼 글씨에 능하였고 백호(白湖) 윤휴(尹鑴,1617~1680),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1622~1680) 등이 만사(輓詞)를 지어 그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1694년 숙종의 폐비(廢妃) 민씨(閔氏) 복위운동을 둘러싸고 소론이 남인을 몰락시킨 갑술옥사로 유배되었다가 1697년에 풀려나 시강원 종2품의 우부빈객(右副賓客)을 지냈다. 당시 숙종은 폐비사건을 두고 남인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여러 당파로 권력을 교체해가며 정국을 주도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서인을 등용한 1680년 경신환국, 남인을 등용한 1689년 기사환국, 또다시 서인을 등용한 1694년 갑술환국 등이 있었다. 이때 소론, 남인 등 구분 없이 시류에 따라 파직과 유배를 많이 당하였다.

이후 1701년 신천군수(信川郡守) 윤희(尹憘) 등이 오시복·민암·목창명 등 남인들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발한 무고(巫蠱)의 옥(獄)에 연루되어 제주 대정현(大靜縣: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부의 옛 행정 구역)으로 안치되었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동시에 원지정배(遠地定配)하도록 아뢰었다. 이후 1712년에 함평·강진 등으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 영해부(寧海府)에 이배되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무고의 옥은 희빈 장씨가 취선당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신사옥사(辛巳獄事)를 말한다. 이 무렵 남인들이 서인들을 몰락시키기 위해 희빈 장씨의 친정아버지 장형의 묘역을 일부러 파헤치고 비석을 훼손하는 등 물의를 빚었고, 이로 인해 희빈 장씨는 자결하고, 남인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과 송곡(松谷) 이서우(李瑞雨,1633~1709) 등은 파직되고, 이미 죽은 미수 허목·백호 윤휴·고산 윤선도 등의 관작은 추탈을 당하였다.

오시복은 경주부윤 이후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에 안치되었고, 마침 영천의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1653~1733)이 1701년 11월에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제수되어 다음해 3월 근무를 위해 제주도에 도착한다. 운명의 장난처럼 제주에 유배 중인 오시복이 제주목사 병와 이형상을 만나 일부 도움을 받게 되는데, 이 일로 인해 노론의 대사간 이건명(李健命)의 탄핵을 받아 이형상은 제주목사 재임기간을 다 마치지 못하고, 1년 만에 파직되었다. 결국 그는 1703년에 관직이 삭탈되어 영천으로 돌아갔다.

당시 이형상은 제주 목사로 있으면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등을 제작하면서 오시복의 도움을 받았고 이들의 교유는 긴밀하였다. 이형상은 앞서 1699년 8월부터 1700년 3월까지 경주부윤을 지냈기에 제주에서 전 경주부윤을 만난 인연은 참으로 기구하였다.

오시복이 경주를 다스린 1688년 이후 임홍망(任弘望)-유하겸(俞夏謙)-김해일(金海一)-원진택(元振澤)-허영(許穎)-손만웅(孫萬雄)-남치훈(南致薰)-홍득우(洪得禹)-심극(沈極)-이형상 등 불과 10년 사이에 10명의 부윤이 체임되었으니 극심한 붕당정치의 폐단이 느껴진다.

이들이 제주도에서 어떤 얘기들을 주고 받았을까? 국가의 안위와 남인의 거취 그리고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학술연구를 통해 지금이라도 이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찾아서 듣고 싶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