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종 삽살개 복원·보급에 한평생 기여한 하지홍 교수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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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삽살개의 대부 하지홍 교수. |
삽살개는 경북대학교 하지홍 교수에 의해 1992년 3월에 우리나라 축양동물 토종개 중에서 두 번째로 천연기념물 제386호 경산의 삽살개로 지정 등록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그를 삽살개의 대부라 한다.
삽살개의 연구는 경북대학교 수의학과의 탁연빈 교수 등에 의해 1969년부터 시작되었다. 과학기술처의 용역사업으로 1971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전국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수집한 삽살개 30두(경상도 23두 강원도 7두)에 대한 ‘삽사리의 보호육성 및 개량번식에 관한 연구’가 최초의 결과이다.
용역 결과물인 삽살개는 연구자의 지도교수인 하성진(경북대 수의학과) 교수의 농장에서 보호되었다. 하성진 교수의 아들이 바로 하지홍 교수이다. 1953년 대구에서 출생한 하지홍은 경북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미생물 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 모교인 경북대 유전공학과 교수로 돌아와 삽살개 연구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농장에서 키웠던 과거의 삽살개는 대부분 흩어져 겨우 8마리가 남아있었다. 마지막 8마리가 하지홍 교수의 노력으로 1989년엔 30여마리로 늘어났다.
하지홍 교수는 1989년 7월 3일에 경북대학교 탁연빈 교수 연구팀이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전국에서 수집한 원종 30여두에 대한 연구 결과인 외형특징, 모질, 두상, 견체 외관, 성품, 체질적 특징, 특이 유전자 계열 등을 근거로 천연기념물 지정 신청을 하였으나 유전형질, 혈통 등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1990년 2월 3일에 문화재청 심사에서 보류됐다. 1990년 4월 17일과 7월 7일 재심을 요청하였으나, 또 과학재단의 삽살개 연구 최종 보고서가 완료될 때까지 재심의가 연기되었다.
1991년 8월 13일 체육청소년부 장관에게 삽살개 천연기념물 지정을 위한 요청과 한국생물과학협회 학술발표대회(1991. 10. 25)에서 발표한 과학재단 연구 결과인 ‘삽살개의 모색과 DNA 지문에 의한 혈통분석, 외형적 특성’과 방송 다큐멘터리 ‘우리 삽살개를 아십니까’ 등의 영향으로 재심의가 접수되었고, 1991년 11월 14일 현지 조사에 의한 66두의 삽살개와 가계도가 확인되어 문화재청 문화재심의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1992년 1월 29일 천연기념물 지정 지침이 검토되었고, 너무나 길었던 심의가 끝나고 1992년 3월 5일에 천연기념물 제368호 경산의 삽살개로 지정되었다.
하지홍 교수는 심의 신청, 재심 요구 등은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문전박대만 당했고, 수십번을 문화재관리국에 드나들었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고, 어떤 지원이나 관심도 받지 못하여 좌절할 때도 있었다. 멸종 위기의 삽살개를 구해 이름을 알리고 싶은 학자의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했지만, 학문적인 시기와 질투, 20여년을 삽살개 먹여 살리느라 유산을 다 팔았던 경제적 고통과 비방은 자부심으로 버텨냈다.
삽살개의 연구는 경북대학교 수의학과의 탁연빈 교수 등에 의해 1969년부터 시작되었다. 과학기술처의 용역사업으로 1971년 4월부터 6월까지 3개월간 전국을 대상으로 조사하여 수집한 삽살개 30두(경상도 23두 강원도 7두)에 대한 ‘삽사리의 보호육성 및 개량번식에 관한 연구’가 최초의 결과이다.
용역 결과물인 삽살개는 연구자의 지도교수인 하성진(경북대 수의학과) 교수의 농장에서 보호되었다. 하성진 교수의 아들이 바로 하지홍 교수이다. 1953년 대구에서 출생한 하지홍은 경북대학교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에서 미생물 유전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1985년 모교인 경북대 유전공학과 교수로 돌아와 삽살개 연구에 뛰어들었다. 아버지의 농장에서 키웠던 과거의 삽살개는 대부분 흩어져 겨우 8마리가 남아있었다. 마지막 8마리가 하지홍 교수의 노력으로 1989년엔 30여마리로 늘어났다.
하지홍 교수는 1989년 7월 3일에 경북대학교 탁연빈 교수 연구팀이 1969년부터 1972년까지 전국에서 수집한 원종 30여두에 대한 연구 결과인 외형특징, 모질, 두상, 견체 외관, 성품, 체질적 특징, 특이 유전자 계열 등을 근거로 천연기념물 지정 신청을 하였으나 유전형질, 혈통 등이 미비하다는 이유로 1990년 2월 3일에 문화재청 심사에서 보류됐다. 1990년 4월 17일과 7월 7일 재심을 요청하였으나, 또 과학재단의 삽살개 연구 최종 보고서가 완료될 때까지 재심의가 연기되었다.
1991년 8월 13일 체육청소년부 장관에게 삽살개 천연기념물 지정을 위한 요청과 한국생물과학협회 학술발표대회(1991. 10. 25)에서 발표한 과학재단 연구 결과인 ‘삽살개의 모색과 DNA 지문에 의한 혈통분석, 외형적 특성’과 방송 다큐멘터리 ‘우리 삽살개를 아십니까’ 등의 영향으로 재심의가 접수되었고, 1991년 11월 14일 현지 조사에 의한 66두의 삽살개와 가계도가 확인되어 문화재청 문화재심의위원회의 결의에 의해 1992년 1월 29일 천연기념물 지정 지침이 검토되었고, 너무나 길었던 심의가 끝나고 1992년 3월 5일에 천연기념물 제368호 경산의 삽살개로 지정되었다.
하지홍 교수는 심의 신청, 재심 요구 등은 문화재관리국으로부터 무수히 많은 문전박대만 당했고, 수십번을 문화재관리국에 드나들었지만 결과는 매번 같았고, 어떤 지원이나 관심도 받지 못하여 좌절할 때도 있었다. 멸종 위기의 삽살개를 구해 이름을 알리고 싶은 학자의 욕심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했지만, 학문적인 시기와 질투, 20여년을 삽살개 먹여 살리느라 유산을 다 팔았던 경제적 고통과 비방은 자부심으로 버텨냈다.
천연기념물 지정 초기에는 삽살개에 대한 외모와 품종표준의 기준이 명확하게 평가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국품종을 이용해 인위적으로 개량한 가짜라는 논란에 휩싸였고, 한국동물보호가 윤신근 수의사의 검증되지 않았던 가짜 삽살개 주장 등으로 삽살개 외형의 진위 논쟁과 비난이 시대의 관심을 뒤덮었고, 애견 업자들은 “개값을 높이려고 천연기념물로 지정받고 독점한다”는 비방 등을 이길 수 없었던 하지홍 교수는 천연기념물 지정 3년 후인 1995년에 육종 포기를 선언했다.
자신의 순수한 뜻과 의지가 왜곡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연구할 수가 없음을 깨달았고, 학문적 연구에만 전념할 생각이라면서 “논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밉기도 하지만, 삽살개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오히려 이제는 홀가분하다”고 말하고 삽살개 연구를 정리하기도 했다. 청춘을 삽살개와 보내는 바람에 개인의 시간은 없었다. 또 많은 비로 금호강이 범람했을 때는 아버지와 함께 삽살개를 피신시키느라 온 밤을 지세웠고, 경제 사정이 나빠지고 몸은 고단했지만 학자의 양심 때문에 힘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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