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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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철 교수
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
어느 트로트 가수의 음주 뺑소니 사건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의도적인 증거인멸 행위는 그의 듬직한 모습답지 않았고, 범인 도피 및 사법 방해 행위는 당당한 그의 목소리답지 않았다. 그는 음주 운전을 했다. 즉시 현장을 벗어났으니 음주 뺑소니를 친 것이다. 그러니 음주 여부를 판별하는 호흡 측정이나 혈액 채취의 기회가 없었다. 아니 없앴다는 표현이 맞는다. 운전자 바꿔치기도 시도했다. 사고 이후에 추가로 음주를 했다. 다분히 의도적이다, 적극적인 허위 진술도 했다. 무엇보다 차량 내 블랙박스를 없애버렸다. 탑승했던 차량 수만큼 3개의 블랙박스 메모리카드를 고의적이고 적극적으로 제거했다. 검찰이 단순 음주 뺑소니가 아니라 조직적이고 계획된 사법 방해 사건으로 보는 이유다.

잘 알다시피 블랙박스(Black box)는 항공기나 자동차에서 사고가 발생했을 때 사고 원인과 경과를 빠짐없이 기록하는 핵심 장치다. 이때 블랙은 색깔이라기보다는 비밀의 뉘앙스를 가진다.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말이다. 가령 범죄자나 테러리스트 같은 위험인물의 명단을 의미하는 블랙리스트(Black List)가 그 블랙이다. 상대방을 협박하거나 강요를 통해 금전이나 이익을 요구하는 블랙메일(Black Mail)도 마찬가지다.

어쨌든 해당 가수는 숨기고 싶은 범죄행위를 ‘검은 상자’에 잘 밀봉한 것처럼 보인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입을 굳게 다문 채 눈만 깜박거리는 상대 의중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동 중인지 아닌지조차 가늠 안 되는 인공지능(AI)의 마음속도 검은 상자 그 자체다. 메타 사(社)의 AI 책임자 얀 르벡은 “아무리 인공지능이고 챗GPT라고 해도 인간 수준의 추론과 계획 능력은 갖추기 힘들다”라고 말했지만 쉬이 수긍하긴 어렵다. “핵무기 코드를 훔치겠다”거나 “인류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개발하겠다”는 식으로 AI가 뱉은 말들이 농담인지 의도된 진심인지 우린 그 진의를 모른다. 인공지능이 고도로 블랙박스화될수록 이들을 통제 불가능한 존재로 치부할
 우려는 커진다. 인간에게 이 ‘알 수 없음’은 공포와도 같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훈련 중이던 근위 기병대 군마들이 인근 공사장 발파음에 놀라 질주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기병은 날뛰는 말에서 떨어졌고, 통제되지 않는 말들은 지나가는 버스나 승용차와 충돌했다. 유리가 깨지고 차체가 찌그러졌다. 복잡한 도로, 형형색색 자동차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소리치며 사진 찍는 사람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무작정 달렸을 말들 눈에 비친 런던 도심은, 더 이상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더 안타까운 사건은 충남 당진에서 벌어졌다. 1평짜리 철창에서 20년 넘게 갇혀있던 곰에게 자유가 우연히 찾아왔지만 주변을 배회하다 사살된, 안타까운 사건이다. 웅담 채취용으로 사육되어 온 그 곰은 왜, 철창을 벗어나질 못했을까? 도축되는 동료들을 보고는 인간 세상에 대한 희망을 접어서일까, 아니면 좁지만 익숙한 철창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했을까. 현행법에 따르면 10년 이상 사육한 곰은 언제든지 도축해 웅담 채취가 가능하다니, 상황이 녹록지 않다. 심리학에서는 이 상황을 ‘학습된 무기력’이라는 용어로 해석한다. 지식이나 지혜와 달리 배우고 경험해서 축적한 결과물이 그저 무기력(weakness)이라면, 문제를 해결하고 상황을 벗어나기보다 그저 버티고 견디는 수밖엔 없다. 그 반달곰이 미처 경험해 보지 못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다. 애초부터 비교항이 전제되지 않았기에 현실이 아무리 열악해도 도망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다르지 않다. 며칠 전 일본의 라면 가게에서 찍은 영상은 그래서 흥미롭다. 불길이 천장으로 솟고 연기도 자욱한데도 가게 안 직원들과 15명이나 되는 손님들은 아무런 동요 없이 라면을 먹고 있다. 불타는 가게 안에서 과연 무엇을 생각했길래 이런 기괴한 장면을 연출해 낸 걸까? “대피하라!”는 지시가 없었기에 설마 어느 누구도 그 현장을 벗어날 필요를 못 느꼈던 건 아니었는지....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고,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갇히기도 한다. 블랙박스가 무서운 이유다. 때마침 해당 가수가 구속되었다는 속보가 떴다. 끝까지 숨기고 싶었을, 그 검은 상자가 이번엔 활짝 열리게 될지 차분히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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