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자궁이 있고 왕실에서 잔치를 베풀던 동궁과 월지(3)

하성찬 시민전문 기자 / 2024년 08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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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측 월지 전경. 어느쪽에서 보아도 전체를 조망할 수 없어 바다를 연상시킨다. 호안은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측의 입수부는 미적 감각과 찌꺼기를 거르고 용존 산소를 높이기 위해 과학적으로 조성하였다.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월지는 과학적으로 조성되었다.
월지의 규모는 동서 약 200m, 남북 약 180m로 전체 면적이 1만 5658㎡(4738평)이다. 호안 석축의 길이는 1005m이고, 섬을 포함하면 1285m이다.

서쪽은 연못을 내려다볼 수 있게 5.1m의 높은 대(臺) 위에 건물을 짓고 남·동·북은 1.2m로 낮게 호안을 조성하였다. 건물이 있던 서쪽과 남쪽은 호안을 직선으로 처리하고 직각으로 꺾어 못 안으로 돌출시키고, 동쪽과 북쪽은 절묘한 굴곡으로 직선과 곡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연못의 어느 쪽에서 보아도 전체를 볼 수 없도록 하여 바다를 연상하도록 하였다.

명나라 문인화가 동기창은 ‘소중현대(小中現大)’라고 하여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월지라고 하는 작은 연못을 조성하면서 바다를 표현한 신라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동기창은 아마 몰랐을 것이다. ‘신(神) 즉 자연은 곡선을 만들고 인간은 직선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자연과 인공의 조화’, 당시 신라인들의 안목에 할 말을 잃는다.

연못 바닥은 두께 50cm 정도의 점토와 자갈 등을 섞어 강회다짐을 하여 물이 새지 않도록 하였고, 바닥 전체에는 굵은 모래와 자갈을 깔았다. 연못 한가운데에 한 변이 120cm인 정(井)자형의 나무곽을 만들어 그 속에 연꽃과 같은 수초를 심어 못 전체로 번지는 것을 방지하였다.

연못의 동쪽과 북쪽은 낮은 언덕을 조성하여 중국 초나라 양왕이 선녀들과 노닐었다는 고사에 등장하는 무산12봉을, 그리고 연못 속에는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을 상징하는 영주·방장·봉래의 세 섬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곳은 도교의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공 바다였던 것이다.

월지의 시설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입수부와 배수부이다. 입수부는 물을 끌어들이는 장치를 한 곳으로 못의 동남쪽 귀퉁이에 있다. 동남쪽의 계류나 북천에서 끌어온 물을 거북이를 음각한 것 같은 아래위 두 개의 수조에 고이게 하였다가, 자연석 계단으로 흘러 폭포로 떨어져 연못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위 수조에는 용머리 토수구(吐水口)를 설치하여 용의 입으로 물을 토해서 아래 수조로 떨어지게 만들었다. 이 용머리는 없어지고 지금은 용머리를 끼운 자리만 남아 있다.

아래 수조에서 연못으로 떨어지는 폭포의 높이는 약 1.2m 정도이다. 또한 물이 입수부의 완충 수조를 지나 못으로 수직 낙하하는 지점에 판판한 돌을 깔아놓았는데, 이는 못 바닥의 침식을 막기 위한 것이다. 심산유곡에서나 볼 수 있는 이런 현상을 재현한다는 미적 감각도 놀랍지만 수조를 거치는 동안 물속에 있던 찌꺼기가 걸러지고 그 물이 폭포로 떨어지면서 용존 산소를 높였을 것으로 생각할 때 당시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조상들의 지혜가 놀랍다. 

또 못 안으로 들어온 물이 그대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입수부 바로 앞에 섬을 배치하여 그 좌우로 물이 갈라져 못 전체로 물이 흐르도록 세심하게 배려하였던 것이다. 입수부를 통해 들어온 물은 연못 안의 곳곳을 돌아 동북쪽으로 나 있는 출수구로 흘려보냈다. 출수구에는 상하로 뚫린 3개의 구멍이 있는데 나무로 된 마개로 수위를 조절했음이 밝혀졌다.

정원(庭園)의 물은 성(聲)·류(流)·광(光)의 세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고 한다. 월지의 입수 부분에 폭포를 이루어 물이 떨어지니 소리가 들렸을 것이고(聲), 입수구에서 끊임없이 물을 공급하고 앞에 있는 섬을 휘돌아 연못 전체 물이 흘렀을 것이며(流), 찌꺼기를 거르는 장치를 두어 항상 맑은 물을 공급하여 바닥까지 빛이 비치는(光) 등 이곳 월지는 정원수의 3요소를 충분히 갖추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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