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나눔: 사돈댁, 향교, 영남 일대로… 문화사적 기여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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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를 바르지 않은 채 앙상한 문살을 드러낸 교촌 어느 집의 모습. 종이가 사라진 풍경이 낯설다. |
↑↑ 박근영 작가 |
한지에는 다량의 꾸지나무가 필요했는데 종이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꾸지나무 생산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따라서 최부자댁에서는 꾸지나무를 주로 생산하는 밭을 만들었는데 이 꾸지나무를 심은 밭을 ‘괴밭’이라 불렀다. 특이한 것은 괴밭은 꾸지나무만 가득 심지 않고 밭에 울타리 식으로 심어 조성했다는 것이었다. 꾸지나무의 특성이 한꺼번에 다닥다닥 붙여서 심으면 잘 자라지 않고 논이나 밭두렁에 울타리 식으로 성글게 심어야 잘 자랐기 때문이다.
내가 어렸을 때 보았던 교촌의 닥나무들도 이렇게 봇도랑을 따라 마치 울타리를 세우듯 길게 둘러 가면서 심었는데 이것을 봐도 최부자댁 괴밭은 닥나무가 아니고 꾸지나무 밭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나 자신 닥나무로 만든 한지와 꾸지나무로 만든 한지가 어떻게 차이나는지 알 수 없어 뒤에 이 부문 전문인들의 조언을 들어볼 예정이다. 어쨌거나 최부자댁에서 주로 생산한 한지는 꾸지나무를 원료로 한 것이 분명하다.
종사자들을 위한 대를 이은 지원, 사돈댁, 향교, 경주 유학을 위한 문화사적 후원자
꾸지나무 역시 이 나무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민들이 따로 있었고 종이를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도 따로 있었다. 당연히 그들도 대를 이어가면 일을 하도록 지원했고 그 장인들에게도 풍부한 혜택이 주어졌다.
예의 울타리식 괴밭을 경작하는 소작인들은 그 괴밭이 있는 논이나 밭을 소작료 없이 붙이는 것으로 꾸지나무 생산에 대한 대가를 대신했다.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울타리 삼아 심은 꾸지만 내주고 그 속의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전부 가질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유리한 경작 조건이었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꾸지나무를 재배하는 농가는 경주 불국사 지나서 ‘괘정리’란 곳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었다. 경주 교촌 인근의 집들에 1970년대까지만 해도 꾸지나무로 울타리를 세운 집이 더러 있었는데 이게 모두 최부자댁에서 종이를 많이 만드는 것을 이용해 푼돈이나마 벌기 위한 흔적이었을 것이다.
종사자들을 위한 대를 이은 지원, 사돈댁, 향교, 경주 유학을 위한 문화사적 후원자
꾸지나무 역시 이 나무만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농민들이 따로 있었고 종이를 전문으로 만드는 장인도 따로 있었다. 당연히 그들도 대를 이어가면 일을 하도록 지원했고 그 장인들에게도 풍부한 혜택이 주어졌다.
예의 울타리식 괴밭을 경작하는 소작인들은 그 괴밭이 있는 논이나 밭을 소작료 없이 붙이는 것으로 꾸지나무 생산에 대한 대가를 대신했다.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울타리 삼아 심은 꾸지만 내주고 그 속의 토지에서 나는 곡식을 전부 가질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유리한 경작 조건이었다. 이렇게 전문적으로 꾸지나무를 재배하는 농가는 경주 불국사 지나서 ‘괘정리’란 곳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었다. 경주 교촌 인근의 집들에 1970년대까지만 해도 꾸지나무로 울타리를 세운 집이 더러 있었는데 이게 모두 최부자댁에서 종이를 많이 만드는 것을 이용해 푼돈이나마 벌기 위한 흔적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생산한 한지는 최부자댁을 상징하는 또 다른 역할을 담당했다. 기본적으로 종이는 매우 비싼 특산품이다. 근대 이전에도 매우 귀하고 비싼 물품이었다. 종이가 귀하니 땅바닥에 글씨를 쓰며 글공부를 했다는 사람이 부지기수고 글씨 연습을 위해 석판(石板)이나 모래로 글씨 쓰는 기구를 만들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역대 최부자댁 가주들은 종이를 생산하면 가장 먼저 사돈들부터 챙겨 보냈다. 앞서 사돈들 대부분이 유명한 집안 종갓집들이고 그들이 명성과 달리 어려운 형편이라 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집안에는 이름난 학자나 선비들이 널려 있어서 종이를 보내는 것이 단순한 선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돈인 각지의 종가댁에 종이를 보냄으로써 사돈댁 선비들이 학문에 전념하는데 작으나마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최부자댁 종이 역시 남석 돌안경처럼 적어도 영남 일대에서는 명품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사돈들을 상객 중의 상객으로 알았을 만큼 정성을 기울였으니 종이를 전해 준 양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그 종이들이 사돈댁을 중심으로 인근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또 다른 종이 공급 대상이 최부자댁이 있는 교촌 향교다. 향교에는 언제나 넉넉한 양의 종이를 공급해 줌으로써 유생들이 공부하는데 부족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경주향교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해 규모가 컸고 최부자댁의 지원으로 형편도 좋아 어느 곳보다 많은 유생들이 공부했다. 그런 향교에 종이를 댔다고 하면 그 수량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향교에는 종이뿐만 아니라 최부자댁에서 보관하는 귀중한 서책들도 수천 권이나 진열해두고 유생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 영남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책들 중 상당수는 바로 그 향교와 지금은 교촌 외곽 남천변으로 옮겨져 있는 사마소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이다.
이와 함께 경주 인근의 학자들이나 선비들 혹은 중요한 분들에게 꾸준히 선물로 보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주는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유학의 본향 같은 곳이다. 얼핏 ‘우리나라 유학’이라 하면 퇴계 이황(1502-1571) 선생과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으로 유명한 안동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이 양동의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이고 그 이전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도록 경주는 전통적으로 유학이 성한 곳이다.
역대 최부자댁 가주들은 종이를 생산하면 가장 먼저 사돈들부터 챙겨 보냈다. 앞서 사돈들 대부분이 유명한 집안 종갓집들이고 그들이 명성과 달리 어려운 형편이라 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집안에는 이름난 학자나 선비들이 널려 있어서 종이를 보내는 것이 단순한 선물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사돈인 각지의 종가댁에 종이를 보냄으로써 사돈댁 선비들이 학문에 전념하는데 작으나마 도움을 주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최부자댁 종이 역시 남석 돌안경처럼 적어도 영남 일대에서는 명품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사돈들을 상객 중의 상객으로 알았을 만큼 정성을 기울였으니 종이를 전해 준 양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그 종이들이 사돈댁을 중심으로 인근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다.
또 다른 종이 공급 대상이 최부자댁이 있는 교촌 향교다. 향교에는 언제나 넉넉한 양의 종이를 공급해 줌으로써 유생들이 공부하는데 부족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경주향교의 경우 다른 지역에 비해 규모가 컸고 최부자댁의 지원으로 형편도 좋아 어느 곳보다 많은 유생들이 공부했다. 그런 향교에 종이를 댔다고 하면 그 수량만 해도 엄청났을 것이다.
향교에는 종이뿐만 아니라 최부자댁에서 보관하는 귀중한 서책들도 수천 권이나 진열해두고 유생들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 영남대학에 보관되어 있는 책들 중 상당수는 바로 그 향교와 지금은 교촌 외곽 남천변으로 옮겨져 있는 사마소에 보관되어 있던 것들이다.
이와 함께 경주 인근의 학자들이나 선비들 혹은 중요한 분들에게 꾸준히 선물로 보내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주는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유학의 본향 같은 곳이다. 얼핏 ‘우리나라 유학’이라 하면 퇴계 이황(1502-1571) 선생과 서애 유성룡(1542-1607) 선생으로 유명한 안동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그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이 양동의 회재 이언적(1491-1553) 선생이고 그 이전 고려와 조선조에 이르도록 경주는 전통적으로 유학이 성한 곳이다.
더구나 경주는 조선시대 후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했던 곳이다. 이름난 선비와 초야에 묻힌 선비들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많았다. 최부자댁 종이가 이들의 공부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면 그 자체로 학문적, 문화사적 가치가 있을 것이다.
부와 함께 사라진 가치 있는 특산품 사업들, 최부자댁을 아쉽고 특별하게 만드는 여운
이런 일을 종합해보면 최부자댁에서 종이를 만들었던 것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바로 ‘지식산업 보급’에 그 중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종이가 귀한 시절,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종이가 귀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닌 시대, 그런 이들에게 최부자댁에서 보내는 종이는 전국 각지의 많은 선비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세월의 변천은 이 종이 제작마저 지금에 이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종이 제작소는 공업화 이후 펄프를 주원료로 하는 현대식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꾸준히 제작되었다.
부와 함께 사라진 가치 있는 특산품 사업들, 최부자댁을 아쉽고 특별하게 만드는 여운
이런 일을 종합해보면 최부자댁에서 종이를 만들었던 것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 바로 ‘지식산업 보급’에 그 중점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종이가 귀한 시절,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종이가 귀해 엄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닌 시대, 그런 이들에게 최부자댁에서 보내는 종이는 전국 각지의 많은 선비들에게 가뭄의 단비 같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세월의 변천은 이 종이 제작마저 지금에 이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종이 제작소는 공업화 이후 펄프를 주원료로 하는 현대식 종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꾸준히 제작되었다.
그러나 신학문의 보급과 현대화의 물결은 서예와 한문 문화를 급격히 밀어냈고 현대적 출판은 더 이상 한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집도 과거의 한옥에서 점차 현대식 주택으로 변화되어 한지의 사용과 생산은 한지의 질감이나 우수성과 상관없이 도태되기 시작했고 최부자댁 역시 더 이상 한지를 생산할 여력을 가지지 못했다. 최근 들어서 서예가 취미생활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90년대 이후 한지가 펄프로 만든 종이에 비해 문자 보존성과 종이 자체의 내구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로 인해 한지가 다시 제작되기 시작한 것을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 장에서 돌안경을 일체 판매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한지의 경우에도 단 한 차례도 판매한 적이 없었다. 처음 종이를 만들게 된 이유가 종이 생산이 워낙 만만치 않은 일이고 수요가 보장되지도 않아 최부자댁 정도의 부자가 아니면 꾸준히 생산하기 힘든 품목이었을 것이다. 최부자댁 역시 처음에는 구입해서 쓰다가 집안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 많은 수요가 발생했을 것이고 사서 쓰려니 그것을 제때 공급해 줄 곳이 없으니 자체 생산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게 종이를 만들고 보니 종이가 없어 곤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었고 그게 전통이 되다 보니 교육적인 효과까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물론 판매를 하지 않은 데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을 중시한 탓도 있을 것이다. 물건을 만드는 장인을 천시하고 파는 상인은 더 깔보는 시절이었으니 장사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료나 지방관들로 인해 나라꼴이 엉망이었고 양반가에서도 돈만 벌린다고 하면 족보까지 팔아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구나 종국에는 반만년 유구히 전해오던 나라까지 일본에 팔아넘긴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그런 무도(無道)한 시대,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벌 수 있는 기반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업화하지 않고 은인자중(隱忍自重) 할 수 있었던 것은 최부자댁 조상들이 얼마나 분명하게 가계의 전통 가치를 지켜왔는지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한지만 해도 만약 최부자댁에서 이것을 내다 팔았다고 하면 상당수의 한지 생산업체나 장인들은 최부자댁의 질이나 생산력, 특히 가격 경쟁력을 따라오지 못해 줄줄이 도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자칫 지나친 욕심으로 영세한 종이 제작업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면 ‘경주최부자댁’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석돌안경과 마찬가지로 최부자댁 한지 생산이 중단된 것은 매우 아쉽다. 역사에 만약이 있을 수 없다지만 최부자댁에서 계속 부를 유지한 채 종이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쯤은 세계적으로 가장 전통 있고 질 좋은 종이의 면모를 경주에서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또 한편으로 경주최부자댁이 조금 더 조명된다면 내남면 어딘가에 전통 한지 제작소를 세우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단순히 보여주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양질의 종이를 만들어 경주최부자댁 브랜드로 상품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경주 인근의 논이나 밭이 경작할 사람이 없어 방치되는 경우도 많은데 여기에 꾸지나무나 닥나무를 심어 한지 용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으로 경주만의 새로운 특산품을 만들고 숲이나 밭 자체도 탐방지로 만드는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최부자댁 시절에는 한지를 상업화시키지 않았지만 이제 최부자댁이 존재하지 않은 만큼 좋은 재질의 한지를 생산해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최부자댁 특산품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를 이어가며 부를 아름답게 사용한 보기 드문 집안에서 좋은 뜻에서 이끌어 온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부를 잃으면서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최부자댁이 특별해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앞 장에서 돌안경을 일체 판매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 한지의 경우에도 단 한 차례도 판매한 적이 없었다. 처음 종이를 만들게 된 이유가 종이 생산이 워낙 만만치 않은 일이고 수요가 보장되지도 않아 최부자댁 정도의 부자가 아니면 꾸준히 생산하기 힘든 품목이었을 것이다. 최부자댁 역시 처음에는 구입해서 쓰다가 집안의 규모가 커질수록 더 많은 수요가 발생했을 것이고 사서 쓰려니 그것을 제때 공급해 줄 곳이 없으니 자체 생산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을 것이다. 이렇게 종이를 만들고 보니 종이가 없어 곤란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되었고 그게 전통이 되다 보니 교육적인 효과까지 자연스럽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물론 판매를 하지 않은 데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구분을 중시한 탓도 있을 것이다. 물건을 만드는 장인을 천시하고 파는 상인은 더 깔보는 시절이었으니 장사를 할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료나 지방관들로 인해 나라꼴이 엉망이었고 양반가에서도 돈만 벌린다고 하면 족보까지 팔아대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더구나 종국에는 반만년 유구히 전해오던 나라까지 일본에 팔아넘긴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그런 무도(無道)한 시대, 마음만 먹으면 큰돈을 벌 수 있는 기반이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상업화하지 않고 은인자중(隱忍自重) 할 수 있었던 것은 최부자댁 조상들이 얼마나 분명하게 가계의 전통 가치를 지켜왔는지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한지만 해도 만약 최부자댁에서 이것을 내다 팔았다고 하면 상당수의 한지 생산업체나 장인들은 최부자댁의 질이나 생산력, 특히 가격 경쟁력을 따라오지 못해 줄줄이 도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자칫 지나친 욕심으로 영세한 종이 제작업자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면 ‘경주최부자댁’이라는 이름 자체가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남석돌안경과 마찬가지로 최부자댁 한지 생산이 중단된 것은 매우 아쉽다. 역사에 만약이 있을 수 없다지만 최부자댁에서 계속 부를 유지한 채 종이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다면 적어도 지금쯤은 세계적으로 가장 전통 있고 질 좋은 종이의 면모를 경주에서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또 한편으로 경주최부자댁이 조금 더 조명된다면 내남면 어딘가에 전통 한지 제작소를 세우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다. 단순히 보여주기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양질의 종이를 만들어 경주최부자댁 브랜드로 상품화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은 경주 인근의 논이나 밭이 경작할 사람이 없어 방치되는 경우도 많은데 여기에 꾸지나무나 닥나무를 심어 한지 용으로 사용한다면 그것으로 경주만의 새로운 특산품을 만들고 숲이나 밭 자체도 탐방지로 만드는 아이디어가 될 것이다. 최부자댁 시절에는 한지를 상업화시키지 않았지만 이제 최부자댁이 존재하지 않은 만큼 좋은 재질의 한지를 생산해 문화적 가치를 높이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최부자댁 특산품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대를 이어가며 부를 아름답게 사용한 보기 드문 집안에서 좋은 뜻에서 이끌어 온 유용하고 가치 있는 일들이 부를 잃으면서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최부자댁이 특별해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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