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소이다(3)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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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쪽 창까지는 외부 사다리를 이용하여 올라가고 다시 내부 사다리를 통하여 정상까지 올라갔을 것으로 추정된다.(신라역사과학관 전시물). |
첨성대 기능에 대해서 이런 주장도 있다
↑↑ 하성찬 시민전문기자 |
가장 먼저 첨성대에 대해 현대적인 해석을 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조선기상관측소에서 근무했던 일본인 와다유지(和田雄治)였다. 그는 1910년 ‘조선관측소 학술보고’의 ‘경주 첨성대의 설’에서 첨성대는 그 위에 목조 가구물을 세우고 혼천의 같은 관측기를 설치했던 천문대였으리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1917년 ‘조선고대관측기록 조사보고’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우리나라 학자인 홍이섭도 ‘조선과학사’에서 신라에서는 독자적인 천문관측을 하고 있었으며 그 증거로 경주 첨성대를 들 수 있고 이것은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평가했다. 박동현도 첨성대가 개방식 돔 형태를 가진 천문대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또한 첨성대에 대해 처음으로 정확히 실측하고 연구한 사람은 1962년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 홍사준이었다. 그는 첨성대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 27단의 내부에 반듯이 누워 중천을 쳐다보며 관측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첨성대가 개천설(중국 주나라 때의 우주관으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하여 천원지방이라고 표현)에 의거하여 백제인이 세운 신라 천문대라고 보았다. 이와 같이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8·15해방 전부터 1960년대까지 정설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후 상설 천문대가 아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는 조선 말기 이전까지도 천문대, 즉 천문관측을 하는 곳으로 알고 있었으나, 이후에 이단자(異端者)들은 현존하는 첨성대가 평지(平地)에 있다는 것과 첨성대 자체의 구조상 그 위로 오르내리는 통로가 매우 불편하다는 점 등으로 이설이 제기되어 어떤 이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고 하고, 또 국방과 관련하여 봉화대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혹은 상징적인 달력 건축물이라고 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설과 이견이 속출하고 있다.
물론, 이런 설에 대하여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에서 첨성대는 천문현상을 관찰했던 곳이기 때문에 『삼국유사』에서도 첨성대를 점성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주장도 있다.
첫째, 첨성대가 규표(圭表)를 중심으로 한 다목적관측대일 것이라고 했다가 나중에 개방식 돔으로 관측하기에 불편한 내부구조를 근거로 상설 천문대로 보기 어려우며 백제인들이 주비(周髀)의 법(개천설과 동일)에 따라 세웠을 것이라는 주장,
둘째, 이와 비슷한 견해로 첨성대가 실제로 관측에 사용된 것이 아니며 다만 수학 및 천문학에 관한 당대의 권위서였던 주비산경(周髀算經, 중국의 천문 수학서)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반영하여 축조한 상징적인 탑이라는 주장,
셋째, 첨성대는 천문관측과는 관련이 없으며, 다만 불교의 우주관인 수미산의 모양을 본떠 만든 제단이라는 주장이 있고,
끝으로 첨성대는 넓은 의미의 천문대로 평가하면서도 겉모양은 불교의 수미산을 따랐으며, 토속적 신앙에 따른 농업 신인 영성을 숭배하기 위한 제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인 천문대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 창문 양 기둥 아래에 사다리를 걸치기 편하게 홈을 판 흔적이 있고, 그 안쪽에도 사다리를 걸치기 편하게끔 튀어나오게 끼워 넣은 석재들이 있다. 이렇게 사다리를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정치와 사회에서 역학(曆學)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농업 위주의 고대사회에서 기상의 관측은 실용적인 면으로 중요함은 물론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옛 사람들은 일월성신(一月星辰)의 움직임으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나라의 일관은 이런 면에서 중요한 임무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일식과 월식은 민심에 미치는 영향이 컸으며 이를 예언하기 위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따라서 동양의 고대 사기(史記)에는 여기에 대한 기록이 특히 면밀하다. 『삼국사기』의 기록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일식과 월식에 대해서 빠짐없이 기록됨은 물론이고 일부 기록 내용은 중국 측 사서보다 더욱 정확하다.
경주 하동에 있는 민속공예촌 내의 신라역사과학관에서는 경주의 왕경복원도 및 첨성대의 구조와 천문관측 방법 등을 축소 모형과 그림으로 재구성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대체로 종전의 전통적인 입장인 천문대로 해석하고 있다. 실제 창문 양 기둥 아래에 사다리를 걸치기 편하게 홈을 판 흔적이 있고, 그 안쪽에도 사다리를 걸치기 편하게끔 튀어나오게 끼워 넣은 석재들이 있다. 이렇게 사다리를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가 천문을 관측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 정치와 사회에서 역학(曆學)은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농업 위주의 고대사회에서 기상의 관측은 실용적인 면으로 중요함은 물론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옛 사람들은 일월성신(一月星辰)의 움직임으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도 하였다. 나라의 일관은 이런 면에서 중요한 임무를 가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일식과 월식은 민심에 미치는 영향이 컸으며 이를 예언하기 위해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따라서 동양의 고대 사기(史記)에는 여기에 대한 기록이 특히 면밀하다. 『삼국사기』의 기록도 예외가 아니었으니 일식과 월식에 대해서 빠짐없이 기록됨은 물론이고 일부 기록 내용은 중국 측 사서보다 더욱 정확하다.
경주 하동에 있는 민속공예촌 내의 신라역사과학관에서는 경주의 왕경복원도 및 첨성대의 구조와 천문관측 방법 등을 축소 모형과 그림으로 재구성하여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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