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이재건&조성희 부부 화가 유작전(遺作展)’-그리웠던 이재건 화백 부부, 유작<遺作> 전시로 ‘환생’

오는 21일~30일 서라벌문화회관 두 화가 작품 한 자리에서 감상

선애경 기자 / 2017년 05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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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건&조성희 遺作展’ 전시 포스터.
ⓒ (주)경주신문사


“두 분의 인간으로서의 삶, 그리고 예술에 대한 시선과 고뇌까지도 어림짐작이나마 이해하게 되어, 가슴 속에 두 분을 더 온전히 담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故 이재건, 조성희 화가 부부의 두 남매, 이소명(45) 이준형(43)씨의 말이다. 단 열흘간 故 이재건 화백 부부의 전시를 만날 수 있다. 오는 21일(일)부터 30일(화)까지 서라벌문화회관에서 ‘이재건&조성희 유작전’이 열리는 것이다. 이재건 화백이 작고한지 3년만에, 아내인 조성희 화가가 작고한지는 16년만의 유작전시다.

남매가 기획하고 마련한 전시는 그리움과 정성이 가득하다. 이번 전시에는 이재건 화백의 작품이 묵화를 포함해서 100점 정도(스케치 제외), 조성희 화가의 작품이 47점(스케치 제외) 정도 전시된다. 경주시민과 미술 애호가들은 두 작가의 유작들을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자리인 셈이다. 두 작가를 회고하며 추억하는 시간으로,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지역작가의 혼을 다시 만날 수 있는 전시로 벌써부터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전시 개관식은 24일 수요일 오후 5시 서라벌문화회관에서다.

↑↑ 이재건 화백 作, ‘신라왕경도’, 6.0×2.5m,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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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작전 준비는 하루라도 빨리 마련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번 전시의 총 기획은 이소명씨와 이준형 두 남매가 맡아 진행했다. 보관하고 있는 유작을 포함해, 이미 많은 작품이 개인이나 기관에 소장중이어서 이번 전시에는 여러 소장자들의 협조로 대여해서 전시하는 작품도 있다고 했다. 남매는 입을 모아 “저희가 해야 될 일이었죠. 유작전 준비는 하루라도 빨리 마련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전시 준비하는 기간이 꼬박 일 년이 걸렸고 두 분이 남기신 스케치나 일기 등을 보면서 부모님을 더욱 이해하게 되었습니다”고 전했다.

“아버지의 가장 큰 업적을 꼽으라면, 신라왕경도, 읍성도, 남산도 등이겠지요. 역사 유적에 관한 작품을 고고학적 바탕위에 그리시는 것을 저희도 지켜봤기 때문입니다”

“가시적인 작품들 이외에도 두 분의 정신적 자산도 정리하는 과정이어서 당연히 신경을 써서 집중했습니다. 전시를 위한 준비기간 동안 작품과 자료를 하나씩 일일이 분류했고 두 분의 전시를 준비하는 지라 균형을 맞추는 작업도 힘들었습니다. 부모님이지만 객관적 대상으로서의 관점을 유지해야 했고 화가로 객관성을 담보로 조명해야 해서 조심스럽고 어려웠습니다”고 하면서 경주시 등에 기증 형태로 두 작가의 전체 작품이 보관되기를 바랐다.

-‘예술작품이란 한 인간의 정신력을 온통 바치는 생명력의 결정체’, ‘나의 분신이며 생활의 일기이며 나의 종교이기도 한 작품’
이재건 화백은 1970년 근화여고 재직 시절, ‘예술작품이란 한 인간의 정신력을 온통 바쳐 그의 생명까지도 깎아 바쳐 찾아내야 하는 생명력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화가가 물감을 캔바스에 바르는 것은, 단지 하나의 색깔 있는 물질이 아니라 바로 화가 자신의 정신이며 생명이어야 한다’고 피력한 바 있다.

또 이재건 화백은 ‘나는 나의 작업에서 형식이나 재료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롭다. 대학교 때 동양화과에서 작업하면서도 유화를 함께 접할 기회가 많아 동서양의 재료와 기법을 같이 다룰 수가 있었다. 오늘의 그림은 이러한 과정에서 얻어진 스타일이며, 크로스오버 경향으로 영역의 모호한 느낌을 즐긴다. 나는 내 그림 속에 항상 꿈과 시를 담고자 하는 의식세계를 구축하여 왔고 이것은 나의 천성이며 회화로서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조성희 화가는 2회 개인전 인사말에서 ‘이제 나의 분신이며 생활의 일기이며 나의 종교이기도 한 작품들을 전시하게 되어 부끄러운 마음 앞선다. 예술인이기 보다는 지성인이기를 노력하면서 무언가를 그득 담을 수 있는 그릇이기를 바라고 또 채워도 채워도 항상 비어있는 항아리, 그 빈 마음으로 살아간다’고 했었다.

↑↑ <좌> 조성희 화가 作, Oil on canvas, 97×130cm, 1990년대. <우> 이재건 화백 作, ‘노을산’, Oil on canvas, 45×52cm, 200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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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건 화백의 ‘신라왕경도’, ‘경주남산유적복원도’, ‘경주읍성도’ 제작 이야기
강민수 화가는 이 화백을 기리는 글에서 1992년 제작한 신라왕경도, 경주남산유적복원도, 경주읍성도 제작에 관한 이재건 화백의 글 중에서 아래를 인용했다.

‘필자는 역사가도 고고학자도 아니다. 다만 40년 넘게 이곳에 살면서 어릴 때 뛰어놀던 산천과 동리, 그 속에서 느껴온 역사의 향기와 여러 사학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신라문화유산의 아름다움을 감명 깊게 가슴속에 지녀 온 작은 화가일 뿐이다. 그 옛날 경주를 생각하며 몇 년이 걸려도 한번 그려 보리라고 결심했다’고 적고 있다.

강민수 작가는 이에 대해 “신라왕경도는 순수회화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고증되어야 할 그림이므로 이재건 화백은 수많은 자료를 연구하고, 사학자와 관계 인사들을 만나서 자문을 구했으며, 경주의 골목골목을 수없이 돌아다니며 직접 스케치를 하셨다. 지금은 경주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려는 사람들이나 미래의 경주 발전 계획을 세우는 기관에게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어서 회화적 가치와 역사 문화적 자료의 가치를 동시에 갖는 ‘경주남산유적복원도’를 제작하셨다. 또 경주의 도시환경을 연구하고 경주시가지 발전계획을 세우는데 소중한 자료가 되는 ‘경주읍성도’를 완성하셨다”고 쓰고 있다.

또, 강민수 선생은 “평생을 전업 작가로 지내오면서 위선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자신의 꿈을 그리며, 경주에 애착을 가지고 신라문화를 보존·발전시키기에 고심하면서 살아오신 이재건 선생님은 진실한 화가이자 지성인으로 존경을 받아야 할 것이다”고 했다.

-고 이재건(1944~2014) 선생... 천경자, 김환기 영향 받았으며 평생 예술활동에 몸 담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과 지역 예술 발전 위해 헌신

1944년 경북 군위군 출생으로 아버지를 따라 경주읍으로 이주한다. 대학 입학 전까지 줄곧 경주에서 성장기를 보낸다. 소년시절서부터 윤경렬 선생의 경주박물관 향토박물관 교실에서, 향토사연구반 활동을 하면서 경주의 유물과 유적에 대한 자각을 키우게 된다.

1963년 홍익대학교 미술학부에 입학해 동양화를 전공한다. 1967년 경주 삼보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말년의 회고에 의하면, 대학시절 천경자 교수를 만나면서, ‘파스텔 톤의 색깔과 시적인 것, 특히 채색에 대한 매력’으로 서양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이것이 향후 서양화의 길을 걷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또한, 그림에 시적인 면이 많은 것은 스승이었던 김환기 화백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1970년 경주로 돌아와 근화여자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지내며 지부의 전시회에 초대출품한다. 1972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하면서 친척 박진수의 소개로 조성희 작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했다. 1973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서양화 전공으로 수료한다. 1974년 경주에서 현대 청년 작가 그룹을 결성한다. 대구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전’, ‘오늘의 대구미술전’ 등을 통해 구상화 계열의 작품을 시도한다.

1976년 당시 경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동양화를 가르치는 ‘개미화실’을 열어 학생과 일반인들을 가르친다. 1983년 계명대학교 대학원 회화과에 입학해 회화를 전공한다. 재학 시기에 현대 구상화 계열의 작품을 시도하며, 재료와 양식에서 동서양 혼용적인 회화를 추구한다. 재학중 그의 화법에 마지막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정점식 교수를 만나 ‘미술은 지성이다’라고 하는 결정적인 철학을 그의 창작세계의 신조로 받아들이게 된다.

1989년 침샘암이 발병하고 이후 완치 판정을 받는다. 1992년 ‘신라왕경도’의 제작을 의뢰받고 1년 이상의 사전답사와 고증작업을 거쳐 신라왕경도의 제작을 착수한다. 이 기간, 학술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격과 맞닿아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활기차게 작업을 해 1994년 착수한지 2년여 만에 신라왕경도를 완성해낸다.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으며 이후 주로 유화 작업에 비중을 뒀다.

2004년 1800년대 경주시의 외곽을 둘러싼 성과 마을 모습을 복원해 그린 고고학적 회화 ‘경주읍성복원도(현, 경주문화원 소장)’를 제작했다. 2006년 경주시문화상 예술부분을 수상한다. 2009년 폐암을 진단 받고 2010년 ‘갤러리 휴’에서 제공한 공간에서 작업을 한다.

2012년 가을부터 병세가 악화돼 부산으로 옮겨 장녀의 집에서 함께 산다. 2014년 5월 27일, 71세로 영면에 들었다. 경주에 돌아와 장례하고 유언에 따라 시신은 동국대경주병원에 기증해 다시 한 번 지역사회에 귀감이 됐다. 사후 한국예총경주지회로부터 경주예술인상 미술부문을 수상했다.

고 이재건 화백은 생전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각종매체에 논고를 집필하면서 미술이론가로서, 그리고 여러 단체의 위원직을 맡으면서 문화계에서도 넓은 영역으로 활동했다. 그는 평생 예술활동에 몸 담으면서 왕성한 창작활동과 지역 예술 발전을 위해 헌신했다. 본지에 2008년 4월부터는 미술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다. 한국미술협회, 대구미술단체, 경북창미회, 경고동문회 등 많은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경주미술협회 회장을 맡아 지역 미술 문화 발전과 후진양성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 <좌> 이재건 화백 作, ‘무심’, 수묵채색, 60.5×41cm, 2010년 전후. <우> 조성희 화가 作, ‘어느 봄날’, Oil on canvas, 73×60cm, 2000년(마지막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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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성희 선생(1946~2001)...입원과 퇴원 반복하면서도 늘 삶에 대한 희망, 작품 활동에 대한 의욕 버리지 않아
조성희 선생은 1946년 신의주 출생으로 수도여고를 졸업한 후, 1969년 덕성여자대학교 미술과를 졸업한다. 이후 현대회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결혼 이후 임신과 출산, 육아 등으로 그림을 적극적으로 그리지 못하다가 주로 집에서 그림이 크지 않은 유화 작업을 했다.

‘제3구상회전’에 출품해 1985년까지 활동하고 1988년 신라미술대전에서 입선한다. 이를 계기로 작품의 창작과 화가로서의 대외적 활동에 용기를 얻고 1990년 첫 개인전을 꽃을 주제로 해 연다. 1994년 신라미술대전에서 특선을 하고 경주·포항·울산 등에서 열린 동해남부 여성작가전 등에 2000년까지 출품하고 활발하게 활동한다. 2000년 췌장암이 진행된 것을 알게 되고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작품 활동뿐만 아니라 일상생활도 사실상 불가능해지게 됐다.

이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더욱 쇠약해지면서도 늘 삶에 대한 긍정과 희망, 그리고 작품 활동에 대한 의욕을 버리지 않았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한다. 5월 26일, 향년 56세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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