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로메와 엘렉트라, R.슈트라우스의 파격성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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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동우
울주문화예술회관 관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독일 뮌헨 출생이다. 왈츠 거장 슈트라우스 부자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이다. 슈트라우스 부자와 구별하려고 보통 R.슈트라우스라고 부른다. 부친은 바그너가 신임할 정도의 실력파 호른 주자였다. 하지만 고전주의 음악을 이상으로 여기고 있던 부친은 바그너를 매우 싫어했다.

 R.슈트라우스는 어려서는 이런 부친의 영향을 받았고, 성장하면서는 아내 코지마를 바그너에게 빼앗긴 후 反바그너 계열의 선봉에 선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의 지도를 받아 보수적인 음악환경에 처해 있었다. 하지만 R.슈트라우스는 바그네리안의 길을 걸어갔다. 18세에 바이로이트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을 보고 일찌감치 그의 추종자가 된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다재다능하다는 면에서 R.슈트라우스는 모차르트를 빼닮았다. 그도 교향곡, 협주곡, 오페라 등 다방면에서 폭넓은 재능을 뽐냈다.

R.슈트라우스는 1894년(30세)에 자신이 직접 쓴 첫 오페라 군트람(Guntram) 을 발표한다. 음유시인에 관한 이 오페라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주연 소프라노인 파울리네 데 아나(Pauline de Ahna, 1863-1950)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1905년 R.슈트라우스는 화제작 ‘살로메(Salome)’를 무대에 올린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희곡 살로메를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독일의 대본작가 헤드비히 라흐만(Hedwig Lachmann, 1865-1918)이 쓴 대본은 원작에 충실하다. 살로메가 헤롯왕 앞에서 추는 일곱 베일의 춤은 관능적인 안무로 엄청난 외설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처럼 전위적인 오페라로 세상을 경악시켰던 R.슈트라우스는 일생의 파트너 가 된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 1874-1929)을 만나게 된다. 1909년 호프만스탈의 대본으로 만든 ‘엘렉트라(Elektra)’는 전작을 능가하는 음악적 파격성을 보여주었다. 이 오페라는 아버지를 죽인 어머니에게 복수를 벼르는 딸 엘렉트라의 서사를 담고 있다. 1막으로 되어 있다. 엘렉트라부터 호흡을 맞춘 호프만슈탈은 ‘장미의 기사’,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 ‘그림자 없는 여인’, ‘아라벨라’에 이르기까지 약 25년을 R.슈트라우스와 함께 했다. 찰떡 콤비였던 것이다.

1911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된 장미의 기사(Der Rosenkavalier)는 18세기 빈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모차르트풍의 명랑 오페라다. 하지만 오케스트라 연주나 성악 스타일은 바그너의 음악극을 닮았다. 살로메와 엘렉트라의 파격성에 열광했던 평론가들은 R.슈트라우스가 과거로 회귀했다고 비판했지만,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둔다. 공연관람을 위해 빈에서 드레스덴까지 특별 기차편이 운행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장미의 기사에는 주인공 세 사람이 부르는 마지막 3중창이 유명하다. 이 3중창은 R.슈트라우스의 장례식 때 연주되었다. 본인의 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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