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를 친다고요?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5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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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철 교수
동국대 파라미타 칼리지
어릴 적 참 이해할 수 없었던 어머니 잔소리가 “빨리 먹어!”와 “꼭꼭 씹어 먹어!”였다. 아니 꾸물대지 말고 얼른 와서 먹으라 하셔서 그렇게 했을 뿐인데 왜 급하게 먹냐며 천천히 꼭꼭 씹어 먹으라신다. 상반된 이 두 말이 사실은 똑같은 거란 걸 어릴 땐 몰랐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평면적이지도, 일관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철이 들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런 어머니한테 요즘 세상에 잔소리하실 대상을 꼽아달라면 아마 먹방이나 면치기 아닐까 싶다. 면치기는 알다시피 국수나 라면 등의 면발을 끊지 않고 한 번에 먹는 기술이다. 긴 면발을 수명(壽命)과 연관 지어 끊어 먹지 않으려는 의지나 바램은 나름 의미가 있어 보인다. 문제는 예능 프로나 유튜브의 먹방 채널을 통해 면치기가 어느새 ‘한국인들의 올바른 국수 먹는 법’이 되어버렸다는 데 있다.

이게 얼마나 우스운 상황인지는 라면이나 국수 대신 밥이나 바나나에 대입해 보면 안다. 우리는 볼이 터질 정도로 밥을 입에 넣지 않는다. 목이 컥컥 막힐 정도로 바나나를 욱여넣지도 않는다. 한 숟갈 크기는 우리 입이 한 번에 소화할 수 있는 ‘적당하고 적절한’ 분량이다. 근데 왜 하필 국수만큼은 전투적이어야 하는지 도통 궁금하다 입에다 면을 과하게 집어넣느라 완급(緩急)의 지혜가 빠져버렸다.

미국에서는 레깅스 회사의 음모론(?)이 스믈거리고 있다고 한다. 지금 미국 여성들 사이에서는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레깅스레그(#legginglegs)라는 챌린지가 대세라고 한다. 이상한 이름의 이 챌린지는 레깅스를 입고 똑바로 섰을 때 허벅지 사이에 틈이 보여야 쿨하다는 인식이 드는 게 핵심이다. 아니 허벅지에 근육이 없어서 그 사이가 벌어진 걸 가지고도 멋있다면, 내 왼쪽 귀 높이가 오른쪽보다 살짝 낮으니까 나도 쿨가이라는 논리와 똑같다.

웃픈 현실은 우리도 피할 수 없다. 우리나라 20대 여성 중에서 무려 46%가 살을 빼려고 노력 중이라는 뉴스를 봤다. 그들 6~7명 중 1명이 저체중인데도 말이다. 체중이 미달인데도 다이어트가 시급하다면 자신의 몸에 더 엄격하거나, 남의 시선을 더 의식하거나 둘 중 하나 아닐까. 당당한 몸매보다 더 섹시한 건 자신에 대한 당당함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만, 이런 건 남에게 강요할 수 없는 이슈다. 요즘 술배로 고민이 많은 내가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누구는 거울 속 자신이 뚱뚱하다고 느끼고 누구는 허벅지에 근육 붙었다고(?) 어쩔 줄 몰라 하지만, 또 다른 누구는 그 근육으로 어렵게 하루를 버티기도 한다. 뼈만 앙상한 어르신들 말이다. 젊은이들일수록 얇은 허벅지를 선호하는 것 같다. 날씬하니 이뻐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강상 해석은 다르다. 근육 없이 마른 허벅지는 무릎을 굽히고 펴는 데 무리가 따른다. 근육을 미리미리 저축해 두지 않아 허벅지 근육이 약해지면 무릎의 안정성이 떨어지고 몸의 하중이 무릎에 집중되어 퇴행성 관절염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무릎 안 좋은 어르신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허벅지 근육은 인체에서 가장 큰 당분 저장소다. 허벅지 근육은 섭취한 당의 무려 70%를 소모하여 혈당을 유지시키는, 건강에 핵심적인 부위다. 그러니 먹방이나 면치기를 즐기려면 외려 허벅지가 튼실한 게 적절하다는 말이다. 과체중을 일으키는 잉여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태우려면 허벅지 근육을 강화하는 수밖에 없다. 반대로 허벅지 근육이 모자라면 지방과 노폐물이 쌓이게 된다. 자연히 심혈관 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통통 튀는 젊음의 주인공들한테서 마른 낙엽처럼 바스락거리는 노인들 모습이 중첩된다면 정말이지 큰일 아닌가. 이 모든 게 ‘적절하게’와 ‘적당하게’라는 부사를 제대로 안 배워서 생긴 일들이 아닐까 속상하다. 엄마의 잔소리를 더 들었어야 했나 후회가 된다.

이번 설 연휴 때 일이었다. 거실에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두 분만 덩그러니 계시길래, 식구들 어디 계신가 이 방 저 방 기웃대니 다들 눕고 기댄 채 핸드폰을 쥐고 있다. 밀린 드라마나 영화 몰아보기 중이었다. 넷*릭스의 등장으로 생긴 새 풍속도다. 영상 속도는 기본 1.25배 설정에 지루한 장면이 나오면 제깍 +10버튼(빨리감기 버튼)을 누른다. 다다다다! 더 이상 영화나 드라마를 감상하지 않는다. 밀린 방학 숙제마냥 해치우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면만 치는 게 아니라 지금 대한민국은 온 국민이 ‘드라마 치기’, ‘유*브 치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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