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서울시청 지하에 보존된 군기시터!

역사중요성, 발굴 현장감, 관광성 살린 ‘일거삼득’

박근영 기자 / 2019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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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seoul 에서는’은 본지 이사 겸 서울지사장인 박근영 기자가 본 경주 밖 세상의 다양한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체육, 교육 및 제도에 대해 연재해나가는 코너입니다. 이 연재는 경주의 틀에서 벗어나 대한민국과 세계 전역의 다양한 소재를 알림으로써 경주시와 경주시민에게 참고할 만한 자료를 제공하고자 기획됐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란은 박근영 기자가 이끌어 가지만 독자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좋은 소재 가지신 독자여러분의 참여를 기대합니다.-편집자주

↑↑ 군기시터 발굴 후 원형 그대로 지하 기념관을 만들고 그 위에 건물을 올린 모습.

서울은 조선왕조 5백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특히나 최근세사인데다 기록을 중시한 조선왕조의 특성상 사료도 풍부하다. 그만큼 많은 유적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현대화의 물결은 중요한 종로구, 중구 등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을 초토화시켰고,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려는 일본의 농간으로 인해 궁궐까지 훼손되는 극단적 유적훼손을 겪어야 했다. 유적과 시대성에 대한 보존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을 즈음에는 대부분 한옥식 건물이 사라져버린 후였다.

다행히 1990년대 이후 우리의 경제적 여건이 나아지고 역사와 유적에 대한 인식이 바뀌면서 보전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고 새 건축 혹은 새 건설이 진행되기 전에는 반드시 유적평가를 받도록 조치돼 많은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게 됐다.

대표적으로 ‘군기시(軍器寺)터’가 있다. 군기시터는 서울시청 신청사 건축 전에 유적발굴을 진행한 후 유적은 출토당시의 원형 그대로 지하에 보존한 채 그 위에 빌딩을 쌓아 올려 군기시터의 역사성은 역사성대로 보존화고, 건축은 건축대로 진행한 동시에 관광성까지 높여 일거삼득의 효과를 누렸다. 지하철 1,2호선 시청역 4번 출구 및 을지로 입구 1번 출구로 나가다 보면 시청과 연결되는 지점에 군기시터 기념관이 있다.

군기시는 고려·조선 시대 병기(兵器)의 제조 등을 관장한 관청으로 조선조에는 1392년 (태조1년) 군기감이란 이름으로 세워져 1466년(세조12년) 군기시로 바뀌었다.

당시 군기시에는 644명의 장인들이 활동했으며, 무기제조 기술도 수준급이었다고 전해진다. 화포와 화약을 비롯한 다양한 병장기를 생산하며 조선의 국방에 큰 역할을 했으나 전쟁이 비교적 잦아진 세조 이후에는 중요성이 떨어졌고, 1884년(고종 21년)에 그 직무가 기기국(機器局)으로 이관되면서 폐지됐다. 군기시 폐지는 자주국방 의지의 포기와 같은 것으로 조선은 이후 갖은 외세의 침탈 끝에 1905년 을사늑약을 기점으로 국가의 자주권을 상실하게 된다.

↑↑ 군기시터에서 발견된 고철 유물.

군기시는 일제강점기 경성일보가 들어서면서 터가 잠식됐고 경성부청(京城府廳) 청사가 들어서면서 옛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

정부수립 이후에는 서울특별시 청사로 사용되다가 2009년 철거 후 신청사 건축과정에서 군기시 관련 유물이 대량 발굴되며 역사적 가치를 발산, 발굴 후 원형을 살린 채 건축해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됐다.

발굴 당시 불랑기자포(佛狼機子砲 보물 제861-2호)를 비롯해 승자총통류, 영자총통 등을 비롯한 무기와 무기재료인 덩이쇠, 화살촉이 대거 붙은 덩어리 등 590여점의 유물이 출토됐고 군기시 건물지와 하천 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호안석축 등 45기의 유구가 발굴돼 일부가 군기시터 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다.

경주 역시 향후 추가적 유적 발굴이 계속될 것이고 개발과 보존의 양극에서 갈등이 심화될 수 있다. 경제적 여건의 성숙과 발굴 및 건축 기술 발전이 전제된다면 군기시터를 좋은 사례로 벤치마킹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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