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여야 단단하다

경주신문 기자 / 2024년 09월 26일
공유 / URL복사
↑↑ 강봉원
신경주대학교
문화유산학과 특임교수
매년 2학기에는 고고학 실습 과목을 가르쳐 오고 있다. 실습 수업이지만 유적지를 찾기 위한 여러 가지 이론과 방법론에 대해 먼저 강의실에서 설명한다. 그리고 나서 야외에 나가서 지도 보는 법, 나침반과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현재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아보고 또 유적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지도에 표기하는 법을 실습해 본다. 그러면서 동서남북은 어느 방향인지, 유적지는 주로 ‘어디’에 있는지, ‘왜’ 거기에 있는지에 대해서 배산임수(背山臨水)와 관련하여 논의한다. 실습수업이다 보니 아무래도 야외에 나가서 이곳저곳을 살피고 견학과 답사를 많이 한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학생들을 데리고 학교 뒤에 있는 외외 마을을 지나면서 할머니 한 분과 마주쳤다. 마침 그곳에 흙담이 있길래 학생들이 들으라고 일부러 내가 큰 소리로 “할머니, 여기 담쌓으면서 흙에 잔자갈은 왜 넣었습니까”라고 물었다. 할머니께서 바로 “그래야 야물지”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모든 것이 섞여야 단단해지는 것이다. 할머니께서는 세상 원리를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흙벽돌을 만들면서 짚을 썰어 넣는 것이나, 초가집이나 기와집 벽을 진흙이나 회로 바를 때 짚 혹은 털을 각각 섞어서 반죽하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토기나 기와를 만들 때도 점토만을 사용하지 않는다. 반드시 보강제로 모래나 바위를 잘게 부순 것, 토기나 기와를 빻은 가루, 혹은 조개 가루를 점토와 섞는다. 그렇지 않으면 토기나 기와를 성형해서 말리거나 가마에서 굽는 과정에 갈라지거나 터지게 되어있다. 비 온 뒤 흙탕물이 고여있다가 물이 증발한 이후 침전된 황토에 금이 가고, 심한 가뭄 후에 논이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진다. 점토가 다른 물질과 섞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금은 무르지만 24K 18K는 아주 단단하다. 구리도 물렁하지만 여기에 주석 혹은/그리고 아연을 섞으면 단단한 청동이 된다. 콘크리트, 도자기, 아스팔트, 각종 금속 등 이 세상 대부분 물질이 이물질과 섞이게 되면 단단해진다. 그래서 짬뽕과 퓨전(fusion) 음식도 더 맛이 있다.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단일민족보다는 다민족 사회가 더 강하다. 미국이 여러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세계를 리드하고 있을 만큼 강한 이유도 다양한 인종들이 뒤섞여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우리나라에도 외국인들이 많이 들어와 살고 있어서 이들과 피가 섞이다 보면 강한 나라가 되리라고 예측된다.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간 금혼법이 폐지되어 원하면 혼사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동성동본 간에는 가급적 혼인을 피하는 관습이 있다. 과거 각 마을에서도 며느리나 사위는 같은 동네가 아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구했다. 그러한 것도 강한 유전인자를 가지기 위한 장치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 대부분의 대학에서는 교수를 채용할 때 가능하면 본교 출신자를 배제한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필자와 친한 친구 한 명이 애리조나주립대학교(Arizona State University)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동부 작은 대학 교수로 갔다. 몇 년이 지난 후 모교에서 이 친구의 전공인 중미(Meso-America) 고고학 분야 교수 채용 공고가 났다. 이 친구는 지도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도 지원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의 지도교수는 단호하게 “안 된다”라고 하였다. “왜 안돼요”(Why not)라고 물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우리는 다른 혈통이 필요하다”(We need a different breed)라고 했다는 것이다.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나의 지도교수께서는 내게 “지원은 해도 좋다. 하지만 미국 대학에서는 본교 출신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라”고 하였다. 결국 필자도 지원하지 않았다. 미국의 대학사회에서 ‘동종교배’를 추구하지 않는 이러한 불문율이 대학의 경쟁력을 제고(提高)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섞여야 단단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생각된다.

X
URL을 길게 누르면 복사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