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야전병원’의 여성 참전용사들

변변치 못한 약, 그조차 턱없이 부족했던 야전병원서 부상병 돌봐
밀려드는 부상자와 전사자들, 끔찍하고도 가슴 아팠던 기억

엄태권 기자 / 2019년 06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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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의 38선 전역에 걸친 기습 남침으로 시작된 비극의 역사는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한 한국군 13만7899명이 전사했고,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알지도 못하는 낯선 이국땅에서 유엔군 4만670명이 눈을 감아야 했다. 포화가 쏟아지는 전선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웠던 이도 있었지만, 계속되는 전투에서 발생하는 부상병을 야전병원에서 눈물을 흘리며 돌본 참전용사들이 있었다. 현재 경주에는 간호보조로 6.25전쟁에 참전했던 여성 참전용사 2명이 생존해 있다.

↑↑ 장혜정 여사

-애절한 외침, 18육군병원 참전용사 장혜정 여사.

“지금도 눈을 감으면 꿈속에서 ‘누님! 살려줘요!’라고 애타게 외치던 어린 학도병, 병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립니다. 더군다나 6월만 되면 그 목소리와 모습이 꿈에서도 나옵니다”

장혜정(88) 여사는 아직도 그때의 끔찍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홀로 월남한 장 여사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던 1950년 8월과 9월 경주에 설치된 제18육군병원 간호보조로 6.25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낙동강 전선에는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한 국군과 유엔군, 최단 시간에 한반도를 점령하려는 북한군 간에 처절한 전투가 이어졌고 경주에는 수많은 부상병들이 치료를 받기위해 장사진을 이뤘다.

“경주에 있던 제18육군병원은 5개의 병동이 운영됐어요. 그만큼 부상자들이 많았죠. 제가 근무했던 본동은 지금의 월성초였고 제1병동은 경주공고, 제2병동은 계림초, 제3병동은 황남초, 제4병동은 경주중·고였죠”

제법 규모가 있는 학교는 밀려드는 부상병들을 위한 병동으로 바뀌었고 장혜정 여사는 붕대와 침대보 등을 세탁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한다.

“어린 병사들이 정말 많았어요. 폭탄에 팔다리가 절단된 어린 병사,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둔 병사 등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멀쩡한 사람이 없었죠. 정말 끔찍했습니다. 한 학도병은 ‘누님! 살려줘요! 살려줘요’라며 붙잡고 애타가 울부짖었지만 정작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그래도 의료기술도 부족하고 의사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미군의 원조품이 큰 힘이 됐어요. 일반인은 당시 구경하기도 힘든 페니실린 등 약품을 사용할 수 있었고 붕대도 공급해 주었거든요. 정말 고마웠었죠”

장 여사는 미군이 전투는 물론 부상병들을 위한 의약품 원조가 있었기에 한 생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인천상륙작전과 국군의 반격이 시작되며 장혜정 여사는 육군병원을 나오게 됐고 휴전이 된 후 교직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렸다.

↑↑ 장혜정 여사의 남편인 고 정철화 유공자의 훈장과 유공자증.

2013년 세상을 떠난 국가유공자인 고 정철화 씨가 그의 남편이다. 정철화 씨는 1993년 국가유공자로 등록됐고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 2개의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간호보조로 참전했던 장혜정 여사는 10년 전인 2010년 국가유공자로 등록됐다. 장 여사는 매년 6.25 참전자들에게 연금을 보내주는 정부에게 고마운 마음과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수십 년 세월동안 찾지 않았고 2010년 유공자 등록도 보훈처 공고 등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간호보조로 함께 참전했던 수원에 사는 친구에게서 연락을 받고야 신청하게 됐다는 것.

“이름도 군번도 없이 수많은 어리고 젊은 병사들이 희생됐어요. 상상하기도 싫을 만큼 끔찍한 기억이죠. 그들의 희생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조국 강산에는 아름다운 봄이 찾아왔고 어느덧 여름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이때만 되면 저는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병상에서 신음하던 전우들을 생각나 가슴이 시려지는 계절입니다. 69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눈부신 발전을 이뤄 경제 대국이 됐습니다. 호국정신이 따로 있을까요? 조국을 수호하고 지키려는 마음,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호국정신입니다”

한편, 당시 육군병원에서 장혜정 여사와 함께 근무했던 생존자들이 전국 각지에 있다. 김경주(수원 거주), 황숙향, 김옥련, 정순희, 김진선(명해-개명) 등 4명이 그들이다.

↑↑ 강수자 여사.

-낙동강 방어선 동부전선에서 함흥까지, 강수자 여사.

강수자(90) 여사는 영덕 강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6.25전쟁을 맞게 됐다. 그는 6.25전쟁 발발 초기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강구 해변으로 북쪽에서 많은 목선들이 내려왔어요. 피난민들이 타고 있었던 거죠.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와 쉴 곳과 먹을 것을 제공했는데 빨리 남쪽으로 피난을 가라고 얘기했었죠”

며칠 뒤 쾅쾅거리는 포탄 소리와 함께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피난을 지시했고 강수자 여사 가족은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남겨두고 남쪽으로 피난을 가게 됐다. 포항에 도착한 강 여사는 아버지 걱정에 가족들과 헤어지고 다시 영덕으로 돌아가게 됐다고.

“너무 마음이 불편했어요. 전쟁이라는 것을 몰라서 죽는다는 생각보다 혼자 계신 아버지가 더 걱정됐죠”

영덕 고향 집에 도착했지만 아버지는 어딜 가셨는지 찾질 못했다. 결국 강수자 여사는 남쪽으로 후퇴하는 군인들과 함께 포항으로 내려오던 중 잠잘 곳과 먹을 것을 위해 군부대에 몸을 맡기게 됐다. 북한군의 빠른 남침으로 전선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강 여사와 군부대가 있는 포항의 청하 인근까지 내려오게 됐고 부상병이 속출하자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간호보조를 맡게 됐다.

“부상병을 돌보는 위생병들과 간호사들 중에 초등학교 선생으로 근무할 때 만난 선생님들이 있었어요. 그들이 도와달라고 해서 시작한 것이 간호보조의 시작이었죠”

부상병을 돌볼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라 강수자 여사는 지인들과 다른 부대에 지정됐고 의료기구들을 씻고, 식사를 전달하는 등의 일들을 맡았다. 계속되는 국군의 후퇴로 포항 남부까지 내려온 강 여사는 부대를 나와 가족들을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부상병을 돌보는 일을 계속하게 됐다.

이후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돼 북진하게 되자 평소 많은 도움을 줬던 부대장이 함께 북진할 것을 권유했고 가족과 헤어지고 갈 곳 조차 마땅치 않았던 그는 부대와 함께 원산을 거쳐 함흥까지 올라갔다.

“함흥까지 올라갔을 때 두만강을 곧 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부대장과 군인들은 두만강만 건너면 고향으로 돌아가 환대를 받을 수 있다고 좋아했었죠. 지금까지 많은 고생을 했지만 보상받을 수 있다는 얘기도 저에게 해줬어요”

하지만 해를 넘긴 1951년 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하게 됐고 동부전선에 있는 강수자 여사가 머물고 있는 부대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눈이 무척 많이 왔었어요. 잠깐 식사하고 나면 군용차가 안보일 정도로 눈이 많이 왔었죠. 그렇게 행군을 하며 후퇴하다가 부대에서 낙오하게 됐어요”

부대에서 낙오하게 된 강 여사는 피난민과 군인들을 태우기 위해 흥남부두에서 정박하고 있던 빅토리아호에 타게 됐고 4일뒤 부산항에 도착하게 됐다. 그 후 포항으로 돌아온 그는 우여곡절 끝에 가족들을 만나게 됐고 돌아간 영덕에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됐다. 강수자 여사는 휴전 후 고향으로 돌아간 젊은 시절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가족과 떨어져 군부대에서 생활했던 것이 좋지 않은 소문들을 만들어 냈었죠. 군인과 놀아났다느니, 북한군 부상병을 치료했다는 이야기들이었죠”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군부대에 있을 때 피 범벅이 된 부상병에게 붕대도 감고 전사자들도 숱하게 보며 고생했는데 그걸 모르고 나쁜 소문이 돌고 하니...”
강수자 여사는 2010년 국가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때의 힘들고 끔찍했던 일들을 잊지 말아줬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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