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림목공기계 홍두표 사장 “사람부터 챙기면 사업이고 봉사고 다 풀리지요”

지킬 수 있는 약속으로 신뢰 구축, 실무자들 의견 반영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 만들며 치열한 경쟁에서 이겨

박근영 기자 / 2020년 03월 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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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두표 사장은 생산 수리하는 모든 기계를 훤하게 꿰뚫고 있는 기계전문가다.

“목공기계 사업을 한 것이 20년 좀 넘었는데 따지고 보면 기계를 팔기보다 ‘신뢰’를 팔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육중해 보이는 목공기계 앞에서 어색하게 미소 짓는 홍두표 회장은 목공(木工)기계를 제작·수리·판매하는 정민목공기계산업 대표다. 서울·경인지역 향우들에게는 외동향우회 사무국장, 재경경주향우회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제20대 재경외동향우회 회장과 당연직인 제35대 재경경주향우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인 ‘마당발 열혈향우’로 기억된다.

원래 전기 관련 사업을 하다 아내가 하던 의류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 동안 그 일에 매달렸고 20여년 전 동생이 하던 목공기계사업에 관심을 가지면서 지금까지 이 계통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켜오고 있다.

“처음 기계 일을 하다 보니 하나부터 열까지 모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기계를 완전히 분해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수 없이 되풀이하면서 기계를 통째로 마스터하게 됐지요”

홍 사장은 거래처에 기계 제작이나 수리를 의뢰받으면 공정을 정확히 이해시키고 거래시 반드시 지킬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으로 신뢰를 쌓은 것이 경쟁 심한 목공기계사업에서 꾸준히 성장한 비결이라 소개한다.

그러나 치열한 국내 경쟁과 꾸준히 성능향상을 보인 값싼 중국산 기계들의 진출은 시장을 위협하는 요인. 이에 대해 홍 사장은 거래처 방문시 직접 사용하는 실무자들로부터 반드시 기계의 보완사항이나 개선사항을 들어뒀다가 이를 바로 개선해 입소문을 탔고 기계를 완성하거나 수리한 후에는 직접 기계를 시운전해보고 납품함으로써 납품 후 A/S로 골치 썩는 일이 없었다. 중국 제품들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내구성에서 국산이나 유럽산들에게 비해 떨어지므로 중요한 사업체들은 ‘정민목공기계’처럼 신임하는 업체의 제품을 고집한다고.

“다행히 목공기계사업이 예전에 비해 활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젊은 퇴직자들이 DIY(스스로 조립하는 목공가구)나 맞춤형 목공예에 관심을 가지고 창업하는 추세고 목공을 가르치는 지자체나 개인교습소들도 늘어나고 있지요”

특히 홍 사장은 젊은 목공사업자들에게 기계를 할부해서 판매하거나 아주 싼 가격에 제공함으로써 먼저 사업기반을 닦도록 후원한 것이 우량 거래처를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고 소개한다.

“무슨 대가를 바라서라기보다 함께 커나간다는 생각이 더 컸던 거지요. 그 중에는 도산한 업체도 있었지만 수 십대의 기계를 두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업체들도 여럿 나왔는데 그들이 우리 회사를 두고 다른 업체들과 거래할 리 없잖아요?”

그런 바탕에는 불경기때 폐업으로 싸게 쏟아져 나오는 중고 기계들을 대량으로 사들여 깔끔하게 수리해 놓았다가 경기가 좋아질 때 다시 사업 시작하는 이들에게 되파는 홍 사장 나름의 비결이 통한 덕분이다. 시장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과감히 대응해온 홍 사장의 수완이 회사를 반석에 올리는 계기였던 셈이다.

↑↑ 직접 거래처에 기계를 실어주는 홍두표 사장의 적극적인 모습.

-외동향우회 총무부터 경주향우회 사무총장, 외동향우회 회장까지, 먼저 손잡고 베풀어 온 마당발 열혈향우

그런 홍사장에게 고향 외동과 경주는 사업과 상관없는 보람과 자긍심의 원천이다.

“제13대 배신철 회장님 시절인 2006년부터 3대 6년 간 외동향우회 총무를 맡으며 자연스럽게 경주향우회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동료·선후배들과 열심히 활동하다보니 재경경주향우회 사무총장까지 맡게 됐죠”

외동향우회 조직이 커지며 16대 최영식 회장시절부터 사무국장을 맡아 다시 4년간 봉사하며 외동향우회가 향우회 최초로 ‘고향방문행사’를 가지게 된 것, 외동향우회 내 6개 초등학교 출신자들이 고르게 외동향우회 회장 등 임원을 맡도록 주선하며 젊은 향우들의 활동이 왕성해진 것, 이에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끼는 원로·선배 향우들을 위해 우이동 계곡에서 원로잔치를 연 것, 외동향우회 이름으로 고향에 지급하는 장학금을 한 해 250만원씩 2명에게 지급하도록 제도화 한 것 등을 보람으로 꼽는다. 외동향우회가 다른 향우회에 비해 젊은 향우들이 많은 이유는 정확한 명단을 확보하고 전체 회원에게 지속적으로 행사참여를 독려한 덕분이라고.

“대부분 향우회가 나오는 사람들에게만 연락하다보니 점점 참여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오지 않는 사람들도 작은 계기만 주어지면 나오게 되고 한두 번 나와서 익숙해지면 정기적으로 나오는 회원이 되지요”

이것이 바로 재경 외동향우회가 젊은 향우들로 넘쳐나면서도 원로들과도 유연하게 화합하는 원동력. 이 과정 속에는 사비 들여가며 후배들을 이끌어온 그의 숨은 노력과 그와 함께 물심양면의 협조를 마다하지 않은 여러 열혈 동료들이 있었음을 홍두표 회장은 부정하지 않는다.

재경경주향우회에서도 총무로부터 사무차장을 거쳐 산악회장을 역임하고 제 32대 최병윤 회장 시절 사무총장까지 맡으면서 산전수전 다 거치다 보니 향우회에도 남다른 보람이 있었음은 당연하다. 사무총장 시절 이전까지 기록에 소홀했던 향우회 살림을 장부화 해서 물려 준 것이나 행사시 사은품을 일일이 점검해서 질 좋고 가격 싼 제품들을 구매한 일, 경주시청에서 지급하는 향우회 장학금 지급을 학생들의 공부시간인 오전을 피해 오후로 바꾸고 동참한 지역향우회 회장들이 해당지역 학생들에게 직접 장학금을 전달하게 하는 등 제도적 보완을 이룬 것을 보람으로 꼽는다. 이 무렵 재경대구경북시도민회가 활성화 돼 꾸준히 참여하며 경주향우회의 위상을 높인 것도 기억 남는 일이라고. 이렇다보니 사업보다 향우회 일에 매달리는 시간이 오히려 더 많을 지경이었지만 고향과 향우들을 위하는 봉사라 여기고 기꺼이 참여했다고 술회한다.

사람 좋아하고 아우르는 것을 즐기다 보니 공장이 있는 김포시와 자택이 위치한 인천에서의 활약도 눈부시다. 김포시 상공회의소 수석부회장, 김포시 체육회 이사, 인천 경상도민회 회장 등 타이틀도 여럿이다.

“누군가 해야 할 일이면 내가 먼저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향우회에 봉사하는 후배들이 많은데 이들도 아마 같은 마음일 것이라 여깁니다”

사업에서나 향우회에서나 먼저 손 내밀고 베풀어 사람부터 챙기는 홍두표 사장,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어디서건 할 말 하는 카리스마가 사업에서고 봉사에서고 그를 ‘중심인물’로 이끈다. 홍 사장이 쉽게 피해나갈 수 없는 천성이고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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