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법 전문’ 권은민 변호사 “북한에 전단 뿌릴 권리 있나요?”

스스로를 발전시켜나가며 삶의 희열과 보람느껴

박근영 기자 / 2020년 06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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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은민 변호사.

-남북 교류 법들이 30년 넘은 오래된 것들이더라고요. 이걸로 과연 판결할 수 있을까요?

“북한으로 전단 뿌리는 걸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터뷰하러 간 기자에게 권은민 변호사가 자리 앉기 무섭게 던진 질문이다. 최근 일부 탈북단체들의 대북전단살포와 관련, 북한에서 연일 남한에 대한 성토가 잇따르고 있어서 품는 의문인 듯하다. 그로부터 10여분, ‘과연 이게 바람직한 행위인가? ‘북한에 대해 그럴 권리가 있는 것인가?’, ‘만약 중국이나 일본이 우리를 비방하는 삐라를 보낸다면 그걸 어떻게 보겠는가?’, ‘심지어 쓰레기를 다른 나라에 버리면 안 된다’는 농담에 ‘탈북자들 중에는 그런 행위를 통해 조직의 활동성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거나 그런 행위를 통해 북한주민에 영향을 주려 한다’는 논의, ‘그 심정의 절박함에 비해 방법이 너무 원시적이다’는 등 대화가 진지하게 이어졌다. 권은민 변호사가 유독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가 있다.

탈북자나 관련 기관 종사자를 제외하고는 북한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우리 사회에서 권은민 변호사는 법조인 중 아주 드문 북한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북한대학원 대학교에서 ‘북한외국인투자법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2012년부터 동대학원에서 강의도 하고 있다. 북한을 4차례나 다녀오기도 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면서 남한 사회가 통일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품게 되었지요. 당시에 판사로 재직하면서 ‘어쩌면 북한에서 재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떤 기준에서 재판해야 할지 궁금해지더라는 것.

“그렇지 않나요? 남한 중심으로 통일된다고 가정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았을 때 북한법으로 재판할 수도 없고, 분단상황이 오래 지속된 상황에서 일방적으로 남한법을 적용하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그런 의문과 함께 분단상황이란 것에 대한 깊은 회의, 특히 왜 같은 민족끼리, 더구나 가족이 살고 있는 고향에 분단이란 이유로 갈 수 없는 것이 이해되지 않더라는 것. 오죽하면 이산가족이 생전에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는 현실이 상식에 맞지 않았다.

“세계 인권선언에 ‘모든 사람은 자기나라를 포함한 어떤 나라로부터도 출국할 권리가 있으며, 또한 자기나라로 다시 돌아올 권리가 있다’는 항목도 있는데 고향에 가고 싶은 소망이 무시되는 건 참 이해하기 힘든 일이죠”

이런 의문 끝에 북한법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자료들을 찾아보았으나 자료 자체가 너무 적어 조금씩 자료를 모으면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다 거제시 법원에 근무할 때 그곳에서 한국전쟁 때 피난 내려온 주민으로부터 ‘팔순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는데 걸핏하면 ‘고향에 가자’며 짐을 싸는 바람에 가슴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국민이 수십 만 명이라 생각하니 북한연구의 필요성을 더욱 깊이 실감했다고 회고한다.

“이렇게 혼자 힘들게 공부하다 ‘북한법연구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젊은 판사가 제 발로 찾아갔더니 학회에서 아주 반갑게 맞아 주시더군요”

이것이 1998년, 당시 학회 구성원 대부분 원로 교수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종로구 삼청동에 경남대학교가 설립한 ‘북한대학원’이 있어 2000년에 3기로 입학했다. 마침 그해는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과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북한과의 관계가 해빙무드라 연구열기가 한층 뜨거웠고 이런 기류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실용적인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아울러 권은민 변호사는 북한의 사회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북한 소설 수십 권을 읽기도 했다.

“북한 소설들의 대부분 결론이 ‘당과 수령께 충성해야 한다’ 식의 결말이지만 그 이전의 갈등구조까지는 일상적인 소설구조와 비슷해 북한 주민의 사회상이나 의식구조를 간접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었지요”

권은민 변호사는 2002년 미국 하버드 대학으로 유학하면서 이곳에서도 북한 관련 연구를 계속했다. 당시 권은민 변호사는 북한법 지식을 바탕으로 남북화해 무드에 편승한 대북 투자에 관심 가지는 글로벌 기업들의 북한 투자상담을 전담하는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고. 마침 이때는 9년 동안의 판사활동을 끝내고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어서 권은민 변호사의 활동이 대내외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던 시기였다고. 아쉽게도 여러 격변 속에서 북한과의 화해무드가 지속되지 못해 남북관계가 좀 더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북한에 대한 연구 활동은 아직도 비중 있게 진행 중이다.

“궁극적으로 미래지향적인 관계 설정이 중요합니다. 법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한민국 영토를 한반도를 포함한 부속 도서로 규정한다’고 한 헌법 제3조에서도 보듯, 북한과 관련한 법적 근거들이 대부분 해방 후 만들어진 오래된 법들입니다. 당시 제정된 법은 분단이 한시적이고 곧 통일될 것이라는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인데, 그것을 75년이 지난 지금에 글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지요. 우리 내부에서 먼저 미래지향적 관점으로 법을 정비해야 합니다”

-경주고도보존회 상임이사, 수필가, 사진작가까지 다양한 분야 섭렵한 ‘신사’, 오늘도 발전하는 삶 추구!
권은민 변호사는 비단 북한법 연구 뿐 아니라 행정소송, 조세소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망 받은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법조계 밖 사회활동에도 만만치 않은 관심을 가지는 특별한 출향인이다. 특히 고향 경주를 향한 오래고 진정어린 열정은 누구보다 뜨겁다. 이정락 변호사와 함께 경주출신 법조인 모임인 ‘법경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하며 2005년 경주고도보존회 창설에 주도적으로 기여했고 현재까지 가장 열심히 참여하는 상임이사다. 그런 그는 경주에 대해 보존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경주는 서울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진정성 있는 고도입니다. 지금도 도처에서 유물과 유적이 발굴되고 있을 정도로요. 이런 진정성은 국가차원에서 지켜져야 하고 경주시의 지자체 단체장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가꾸어나가야 합니다. 인구를 늘인다거나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거창한 약속보다 발굴되는 유물과 유적을 지키면서 이들을 뉴스화 하고 상품화 하는 것에 주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주를 경주답게 발전시킬 수 있지요”

그런 한편 권은민 변호사는 글쓰기에도 남부럽지 않은 경륜을 쌓았다. 수필집 ‘에세이스트’로 2016년 등단한 이후 수필가로 활동해 왔고 지금도 에세이스트에 ‘통일단상’이란 제목으로 연재하고 있으며 경주에 대한 열정과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8년째 경주 서라벌 신문에 칼럼을 쓰고 있기도 하다. 사진에도 각별한 조예가 있어 동호회 작가들과 함께 수차례 사진전을 연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사람에 대한 편견 없이 누구에게나 친근하고 온화하여 그를 아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신사’로 기억되는 권은민 변호사는 그래서인지 사진도 사람 중심의 사진을 즐겨 찍는다.

“지금은 어느 단체에서나 ‘~위원장’ 혹은 ‘~장’으로 불릴 만큼 연륜도 쌓였습니다. 그러나 제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도 변함없이 스스로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작업들을 통해 삶의 희열과 보람을 느낍니다.”

누군가 ‘정치해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고 전하자 ‘권력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은 물음이다’며 일축하는 권은민 변호사. 그와의 담백한 대담은 아무리 길어도 짧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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