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조각을 이끄는 박헌열 교수-서울시립대 퇴임전 ‘대화’, 빛나는 조각인생 회고

시대에 맞는 현대작 채우는 것이 경주가 새로운 천년 준비하는 자세

박근영 기자 / 2020년 10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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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열 교수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대리석과 빛의 투영을 감상할 수 있는 작품.

“요즘은 그게 더 심해졌어요. 작품을 내 의지로 만드는 것인지 재료의 의지로 만드는 것인지 햇갈릴 지경입니다”

경주출신의 유명 조각가 박헌열 교수(서울시립대 조소과)가 정년퇴임을 한 해 앞두고 퇴임기념전을 연 전시장에서 한 말이다. 서울시립대 입구 ‘빨간 벽돌 갤러리’에서 지난 16일부터 10월 27일까지 열리는 전시장에는 지금까지 박교수가 애장하던 시리즈 작품부터 2017년 밀라노 전시에 출품했던 작품, 이후 퇴임전을 열기 위해 준비했던 다양한 작품 100여 점이 주제별로 각각의 전시실에 나누어 전시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오랜 기간 준비했던 전시회를 취소했었어요. 그러다가 마침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로 낮아지면서 부랴부랴 다시 진행하느라 눈코 뜰 사이가 없었어요”

실제로 박교수는 전시회 오픈 직전까지 작업복 차림으로 전시실 전기공사를 손수 진행하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사람 쓰는 것조차 어려워 많은 작업을 직접해야 했다며 고충을 털어놓는다.

↑↑ 박헌열 교수 전시회 제3전시장.

-‘이 소재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영감에 모든 역량 맡겨

박헌열 교수는 대리석이라는 무덤덤한 물질에 빛을 투과시키는 전혀 새로운 기법으로 조각에 생명을 불어넣은 조각가다. 1989년 초, 작업 중에 우연히 발견한 기법으로 조각의 한 면을 5mm 정도로 얇게 만든 후 조각 뒤에서 광원을 비추면 대리석이 가진 질감에 특유의 빛이 살아남으로써 작품에 생명력이 깃 드는 식이다. 돌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감각이 뒷받침 되지 않고서는 쉽게 시도할 수 없다.

빛에 대한 박 교수의 실험은 특히 이번 전시에서 두드러지게 보인다. 조각과 빛이 어떻게 조화하는지 눈 여겨 보는 것은 이번 전시에 특별한 재미를 준다. 작품에 만들어진 여러 가지 구멍과 관(管)은 그것을 비추는 조명으로 인해 작품 개개의 개성을 드러낸다. 작품에 비추는 빛의 방향을 다각도로 조정함으로써 조각이 가진 디테일을 섬세하게 표출한다.

박 교수는 다양한 실험정신을 가진 작가이다 보니 때로는 관람자들이 보기에 다소 기괴하거나 거친 작업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회도 예외 아니었다. 대리석 조각의 여인상의 머리카락으로 철조망 과 돌을 씌워 놓았고 목이 어깨로 파고 들어간 그로데스크 한 남성상과 다리와 필이 오르라든 모습이나 한 인체에 남녀가 공존하거나 3인의 머리가 뒤섞인 작품도 있다.

“이런 작업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사물들이 영원한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닌 비어있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진 박교수인 만큼 그 자신 인간의 공부와 경험을 그다지 신봉하지 않았고 그런 이유로 작품을 만들 때 스스로 치밀하게 작품을 의도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작품을 구상해도 그 구상이 끝까지 같은 형태로 이어진 일이 거의 없었을 만큼 시시각각 변하는 영감에 자신의 손을 맡겨 놓은 채 작업하는 것을 즐긴다. 작업할 재료를 앞에 두고 ‘이 재료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까?’하는 상상에 빠지는 것이 오히려 작업열을 높인다.

“영감(靈感)은 수없이 지나갑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의 영감을 놓치지 않고 극대화 시키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옵니다”

일종의 무아지경에서 ‘신이 내리는 축복’을 받아 작업에 임한다는 것. 그러나 아무리 많은 영감이 주어져도 그것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없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영감은 소용없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 응원 온 경주 사람들과 박헌열 교수.

-한국 조각 세계에 알리는 선구자, 190여 개인전 및 단체전··· 초인적 열정, 서울 시립대학교에서 후진 양성

때문에 박헌열 교수는 일반 작가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치열한 작품 활동을 펼쳐 왔다. 1985년부터 시작해 모두 24회 개인전을 열었고 160여 회 단체전 및 페스티벌에 참가했다.

특히 2011년 4월에는 ISF(국제조각페스타) 서울국제조각 페스타에서 운영위원장을 맡아 맹활약을 펼치기도 했다. 한국 작가 140명, 해외작가 36명이 참여한 이 조각 페스티벌은 서울 예술의 전당 한가람 아트뮤지엄에서 열려 많은 시민의 호응을 얻었으며 조각가를 넘어 박헌열 교수의 대외적인 역량을 알리는 계기도 되었다. ISF는 이후 2019년까지 예술의 전당 한가람홀에서 개최되며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국제조각행사로 자리매김했다.

2012년 5월에는 조각가들의 낙원으로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서 열린 ‘한국조각전’에서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약하며 한국조각의 위상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 조각전은 박 교수 자신의 작품을 비롯 한국 조각가 52명 230여작품을 전시하여 현지인들과 세계 관광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며 K-POP 열풍에 비견할 ‘K-ART’의 진수를 보여주는 행사로 알려졌다. 마침 2012년에는 경주아트페어가 열려 박교수의 작품이 경주실내체육관에서 고향사람들에게도 사랑받은 계기가 됐다.

2013에는 이탈리아 ‘Fiesole Firenze 2013’에 운영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한국 조각가들을 이끌고 참석해 2012년의 열기를 이어갔다. 이어 2015년에도 밀라노에서 열린 한국이탈리아 현대조각전에 참석하며 양국 조각가들의 교류를 넓혔다. 2018년에는 중국 시안(西安)에서 열린 국제조각 워크숍전, 2019년에는 중국 청도에서 열린 국제조각전시회에 참여하며 국제적인 명성을 이어왔다. 이 와중에 2020년 칠곡의 수피아 미술관 개인전까지. 인사아트센트와 예술의 전당. 부산 코엑스 홀, 이천 국제조각심포지엄 등을 오가며 수많은 개인전 및 단체전에 참여했다.

박 교수는 경주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으며 제2회 동아미술상을 수상한 후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나 로마 국립미술대학 조소과, 이탈리아 카라라(Cararra) 국립미술대학조소과를 졸업했다. 카라라는 세계적으로 질 좋은 대리석이 생산되는 명산지로 세계 도처에서 내로라하는 조각가들이 몰려드는 조각의 성지(聖地)다. 2017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박헌열 교수 개인전은 자신에게 제2의 고향이자 자신을 성장시킨 이탈리아에 대한 20년 성숙된 자신의 또 다른 성장을 알리는 계기였다.

이런 열정적인 활동 가운데 중요한 조각 관련 수상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1978년 중앙미술대전 입선과 1982년 동아미술대전 동아미술상 수상을 시작으로 1984년부터 1992년까지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에서 열린 주요 전시회와 심포지움에서 중요한 다수의 상을 수상했다. 이렇듯 젊은 시기 박헌열 교수의 실력은 조각의 본고장이라 불리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먼저 검증되었고 이후 1996년까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프랑스, 미국, 일본 등지에서 작가활동하며 이들 나라의 다양한 도시 미술관에 자신의 작품을 남겼다.

박 교수는 귀국 후 조흥은행100주년 기념전 등 다양한 전시회를 열며 작품 활동을 이어오다 2001년부터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동대학 예술체육대학학장을 지내는 등 행정에도 참여하며 후진양성에도 기여해 왔다.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으로 활동하며 국내 미술계 발전에 헌신했고 현재 한국조각가협회 부이사장과 이탈리아 카라라 출신 한국 미술가들의 모임인 마르텔러 조각회 회장을 지내며 우리나라 조각계의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런 박 교수에게 경주는 자신의 예술을 있게 한 절대적인 모티브를 제공한 근원적 조작의 성지이다. 온 천지가 노천 박물관인 경주야말로 박헌열 조각이 탄생하게 한 자양분인 것. 그런 만큼 고향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

“경주가 신라 천년의 고도이지만 그 후 1천년 동안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데다 일제강점기 수탈까지 당했습니다.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유물과 유적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 천년을 새롭게 해석해서 형상화하고 이 시대에 맞는 현대적인 작품들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고도 경주가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동천동에서 태어나 서울을 거쳐 세계를 두루 돌아 본 후 우리나라 조각 발전에 평생을 바쳐온 조각가 박헌열 교수가 고향 경주에 바라는 바였다. 그의 작품들이 스스로의 영감으로 빛을 발하는 모습이 아직도 왕성한 작품열을 가진 박 교수를 대변하듯 전시장을 빛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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