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덕대왕신종, ‘맥놀이’ 반복되며 끊어질듯 이어지는 종소리의 여운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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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에 있는 성덕대왕신종.


저녁놀을 뚫은 천만근의 종소리
(聲穿暮靄千萬重)
읍성 남문이 밤을 알리며 닫힌다
(認是城南報夜鍾)
휘영청 달 밝은 봉황대 아래 길은
(明月鳳凰臺下路)
바람결에 여음이 끊어질 듯 이어진다
(餘音嫋嫋遠隨風)


조선 후기 학자 유의건(柳宜健, 1687~1760)의 시문집인 ‘화계집’(花溪集)에 실린 ‘봉대모종’(鳳臺暮鐘)이란 시다. 제목은 ‘봉황대의 저녁 종소리’란 뜻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천만근의 종’은 ‘에밀레종’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진 국보 29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다. 봉덕사종(奉德寺鐘)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마당 한쪽에 전시돼 있다.
신종의 주인공인 신라 33대 성덕왕(재위 702~737)은 8세기 초반 35년간 재위하면서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국가경제를 안정화해 통일신라 전성기의 문을 연 왕이다. 고려의 문종, 조선의 세종대왕과 곧잘 비교된다.

성덕대왕신종은 36대 혜공왕(재위 765~780) 때인 771년 음력 12월 14일 완성됐다. 신종 몸체에 새겨진 ‘성덕대왕신종지명’ 등의 기록에 따르면, 성덕왕의 아들인 35대 경덕왕(재위 742~765)은 위대한 아버지를 추모할 목적으로 봉덕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여기에 걸기 위한 큰 종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경덕왕은 종이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종은 그의 아들 혜공왕 대에 이르러 완성된다. 혜공왕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종을 봉덕사에 봉안했다. 이런 이유로 성덕대왕신종은 ‘봉덕사종’으로도 불렸다.

↑↑ 20세기 초 봉황대 앞 종각 모습. 종각 뒤편 경사진 언덕처럼 보이는 곳이 봉황대 고분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4차례 보금자리 옮긴 비운의 역사
이런 사연 속에서 탄생한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 명성과는 달리 이 종은 1200여년의 세월 동안 이곳저곳을 떠도는 기구한 운명을 겪었다.
당초 신종이 설치됐다고 전하는 봉덕사는 오래전 폐사돼 그 위치가 분명하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경주 북천(北川) 남쪽의 남천리 쯤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은 성덕왕이 증조부인 무열왕(武烈王)을 위해 706년 창건했다는 것과, 성덕왕의 아들이자 경덕왕 형인 34대 효성왕(재위 737~742)이 738년 아버지를 위해 세웠다는 2가지 창건 기록이 ‘삼국유사’에 담겨 있다.

신종은 봉덕사에 처음 설치된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초까지 700여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조선 초 숭유억불 정책으로 수많은 범종이 사라지게 됐고, 성덕대왕신종도 위기를 맞게 된다. 세종 6년(1424) 실록에 따르면, 당시 성덕대왕신종도 녹여서 무기를 만들자는 여론이 비등했으나, 왕은 “경주 봉덕사의 큰 종은 헐지 말라”고 명한다. 문화 예술을 숭상했던 성군 덕에 화를 면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봉덕사에 큰물이 져서 건물은 떠내려가고, 무거운 종만 절터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 성덕대왕신종지명. 총 830자로 구성된 이 명문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범종 제작을 추진했던 경덕왕의 효성과 이 사업을 이어받아 완성한 혜공왕의 덕망을 찬양하며 종소리를 통해 궁극적으로 온 누리가 행복과 안락을 누리기를 바라는 발원이 담겼다. 당시의 종교와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제공:국립경주박물관>

그 후 혜공왕 대에 이르러
(厥後惠恭王)
동천 물가에 절을 지었는데
(營寺東川傍)
그 절집 오래가지 못했지만
(招提久莫量)
신종은 누대보다 더 웅대했네
(鐘大逾魯莊)
(중략)
절간 무너져 자갈밭에 묻히자
(寺廢沒沙礫)
신종은 그만 가시덩굴에 버려졌다
(此物委榛荒)
주나라 석고(북 모양의 돌 비석)와 흡사하여
(恰似周石鼓)
아이들이 두드리고 소는 뿔을 가는구나
(兒撞牛礪角)


조선시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경주에 머물며 지은 ‘봉덕사종’이란 시의 일부다. 그는 31세가 되던 1465년 봄 경주 금오산(지금의 남산) 용장사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살다 6년 뒤인 1471년 서울로 떠났다. 그가 경주에 머물고 있을 시기는, 신종이 이미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옮겨간 이후였다. 김시습은 경주에 와서 봉덕사종의 사연을 접한 뒤, 자갈밭에 방치됐던 안타까운 과거와 제자리를 찾게 된 이야기를 노래했던 것이다.

봉덕사 폐사 시점은 1424년 이후 30년 사이 쯤으로 추정된다. 실록에 따르면 세종 6년(1424) 때만 해도 봉덕사는 존재했고, ‘큰 종’(성덕대왕신종) 또한 종루에 잘 달려 있었다. 그러나 단종 2년(1454)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엔 “(봉덕사가) 지금은 없어졌다. 큰 종이 있는데 771년 신라 혜공왕이 만든 것”이란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근거로 봉덕사는 1424년과 1454년 사이에 수해를 입어 폐사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이후 성덕대왕신종은 세조 5년인 1460년에 이르러 새로운 거처로 옮겨진다. 남천(南川) 끝자락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영묘사(靈廟寺)가 새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신종의 고단한 여정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영묘사로 온 지 40여년 뒤 영묘사마저 화재로 소실되면서 또다시 노천에 버려지는 신세가 된 것이었다. 이후 1506년(중종 원년)에 남문 밖 봉황대 고분 밑에 종각을 짓고 또 다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신종은 이곳에서 408년 동안 불심을 일깨우는 범종(梵鐘)이 아닌, 경주읍성의 개폐 시각을 알리는 행정용 관종(官鍾) 역할을 했다. 유의건이 들었던 ‘봉황대의 저녁 종소리’도 이곳에서 울려 퍼졌던 것이었다.

신종의 기구한 운명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진다. 신종은 1915년 일제에 의해 또다시 봉황대 종각에서 경주박물관 전신인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현재 경주시 동부동 경주문화원 자리)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후 1975년 5월 인왕동에 국립경주박물관이 새로 지어지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 1915년 8월 봉황대 앞 종각에 있던 신종을 경주고적보존회 진열관으로 옮길 때의 모습. 둥근 통나무를 깔아 그 위에 신종을 올려놓고 동아줄을 감아 당기는 방식으로 신종을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른쪽 멀리 동아줄을 당기기 위해 설치한 장치가 보인다. <제공:국립경주박물관>

◆아기공양설은 허황된 이야기
이 종의 별칭인 ‘에밀레종’이란 이름은 종을 칠 때마다 ‘에밀레~, 에밀레~’ 하는 아이 울음소리가 났다고 해서 붙여졌다. 여기엔 널리 알려진 ‘인신공양 전설’이 깃들어 있다.

나라의 명을 받은 봉덕사 스님들은 종을 만들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시주를 받았다. 한 스님이 어느 가난한 집에 이르렀을 때 이 집 여인은 젖먹이를 내보이며 “저희 집에서 시주할 거라곤 이 아이뿐”이라고 말했다. 결국 스님은 아이를 어찌 받겠냐며 포기하고 돌아왔다. 이후 스님들은 시주받은 재물로 종을 만들었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어느 날 스님의 꿈에 부처가 나타나 “모든 시주가 같거늘, 어찌 여인의 뜻을 거절했느냐”고 꾸짖었다. 승려는 그 길로 아이를 데려와 쇳물에 넣고 종을 만들자 그제야 소리가 울렸다. ‘에밀레~, 에밀레~’ 하는 종소리가 마치 희생된 어린아이가 엄마를 애처롭게 부르는 것처럼 들렸고, 이런 이유로 에밀레종으로 부르게 됐다는 이야기다.

이 설화는 역사적 기록이 없을뿐더러 과학적으로 입증되지도 않았다. 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 사람의 뼈를 구성하는 인 성분이 검출되지 않았다. 게다가 불교에서 범종 소리는 부처님 말씀이자 자비심의 상징으로, 이 전설은 범종 조성 취지와도 전혀 맞지 않는다. 다만 이 전설은 근대 이후 서양 선교사들의 기록에서 비로소 등장하며 일제강점기 자료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다. 이를 근거로 일부에선 조선 말 경주의 유림 세력들이 불교를 폄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퍼뜨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현존하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신라 종
성덕대왕신종은 높이가 3.66m, 밑지름이 2.27m, 무게는 18.9t에 이른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큰 범종이다.

종의 몸통 앞뒤로 새겨진 비천상과 종을 매달기 위해 만든 용머리 모양 ‘용뉴’(龍鈕) 등 신종의 화려한 문양과 조각 수법도 통일신라 불교조각 전성기의 수준을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종의 가장 큰 매력은 ‘소리’다. 맑고 웅장한 소리를 지니고 있으며 무엇보다 국내 범종 가운데 가장 긴 여운을 지녔다. 이 같은 종소리의 비밀은 일정하지 않은 몸체의 두께에 숨어 있다. 두께가 다른 부위에서 나는 소리들이 서로 교란을 일으키는 ‘맥놀이’ 현상이 반복되면서 끊어질 듯하면서 끊이지 않고 길게 이어진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덕대왕신종 종소리는 2004년부터 직접 들을 수가 없다. 타종을 중단했기 때문이다. 타종을 계속할 경우 종에 충격을 줘 자칫 심각한 훼손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대신 국립경주박물관이 지난해 문을 연 ‘성덕대왕신종 소리체험관’을 방문하면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다. 2020년 타음 조사 때 얻은 음원에 입체 음향 시스템을 입혀 온몸으로 소리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종소리의 여운과 함께 8세기 신라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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