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자서전뿐 아니라 ‘경쟁’ 인생의 가장 큰 무기

아버지 20년 일기는 그 시대 기록 사라진 것 아까워...!!

박근영 기자 / 2022년 05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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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3학년 시절의 일기장.

사람들의 두뇌는 생각보다 복잡해서 억지로 무언가를 찾으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기억이 더 멀리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자신과 인터뷰하라고 했더니 아무리 스스로에게 물어도 도무지 기억을 떠올리기 힘들다며 하소연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도구들이다.

가장 쉬운 것은 일기장이다. 사실 이 일기장을 도구로 쓸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자서전 쓰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적어도 일기를 간직하고 있다는 자체가 그 일기를 쓸 동안은 그만큼 자신을 잘 정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런 사람의 기억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다채롭고 뚜렷하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내가 국민학교 때부터 고등학교까지 백일장에 참가하면서 그 알량한 입선조차 하지 못한 둔재였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런 내가 글과 친해질 수 있었고 무엇이건 마음먹은 대로 쉽게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일기를 꾸준히 썼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를 자신의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놀랄 만한, 아주 특별한 기술이다.

나는 국민학교 시절에 써둔 일기장과 중고등학교 시절에 써둔 일기장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 우리 시대 국민학교 다니던 사람들은 다 기억하겠지만 그때는 개인의 프라이버시 따위은 안중에도 없이 일기장을 내놓고 선생님이 검사했다. 강제로 일기를 쓰게 해서 쓰지 않은 학생들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리거나 교사봉으로 엉덩이를 때리기 일쑤였다.
 
국민학교 때 일기장은 특히 3학년 때 열심히 썼는데 그때 담임선생님이 내 일기를 보고 자주 칭찬해 주셔서 나도 모르게 신나서 썼다. 돌이켜 보면 내가 지금처럼 글 써서 밥 먹고 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이셨던 최영숙 선생님의 격려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민학교 때 내 일기장은 오랫동안 내 뇌리에서 잊혀져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고향집이 시내로 이사 가면서 나에게 돌아왔다. 이사에 앞서 어머니가 일부러 간직해 두신 내 일기장을 건네주신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문교부에서 일기 쓰기를 강조하면서 만들었던 ‘화랑일기장’이란 것이 있었는데 연필로 쓴 일기장을 대하면서 감개무량했던 기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중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에도 줄곧 일기를 썼는데 이 역시 어머니의 특별한 보관으로 아직도 가지고 있다.
내 일기장이 온전히 남은 것과 반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당시 아버지께서 오랫동안 쓰신 대학노트 40여 권 분량의 일기가 한꺼번에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유인즉 어머니께서 이사하면서 많은 책들을 버리셨는데 아들내미 일기는 금방 돌려줄 것이니 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신 반면 남편 일기는 너무 양이 많아서 책들과 함께 큰 짐이라 생각하고는 몽땅 버리셨던 모양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아버지도 안타깝고 어이없어하셨지만 내가 더 아까웠다. 내가 기억하기고 40대 후반부터 줄 잡아 20년 넘게 꾸준히 쓰신 아버지 일기에는 아버지 시대의 경주 이야기와 아버지 시대의 온갖 풍속, 우리 가족에 대한 소중한 단상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을 것인데 그 진솔한 역사가 허망하게 사라진 것이다.
 
일전에 어머니가 쓴 자서전을 소개한 바 있지만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훨씬 길고 많은 이야기를 오랜 기간 손수 기록하신 분이시다. 그 일기가 있었다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서전은 몇 권을 쓰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엇길로 나가보자. 내 주위에는 많은 학부모들이 있는데 그들 대부분 국영수에는 목숨을 걸듯 치중하면서도 일기를 쓰라고 권하는 예를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일기는 너무나 쉬운 국어공부법이다.
 
우리 시대에는 학력고사를 쳤는데 내가 영어나 수학은 변변치 못한 실력이었지만 국어는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건 모두 꾸준히 일기를 쓴 덕분이라고 뒤에 판단했다. 일기는 문장력을 좋게 할 뿐 아니라 정확한 문법을 구사하게 하고 글의 맥락을 쉽게 이해하게 하는 아주 기본적인 수단이다. 게다가 일기는 요즘 학생들에게는 둘도 없이 중요한 ‘논술’을 가장 쉽게 익히는 방법이기도 하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각종 리포트와 과제를 작성해야 하는데 일기에 익숙한 학생은 이럴 때 아주 유리하다. 내가 대학 3학년 때 학교 전체에서 가장 놓은 평점을 기록해 성적우수장학금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대부분 시험이 ‘논’하는 것이었다. 오랜 일기로 글쓰기에 자신이 있었는데다 학보사에서 체계적인 글쓰기 공부도 했으니 당연히 내가 쓴 리포트나 논술은 좋은 성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글쓰기가 또다시 중요하게 대접받고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 취업과 대학원 진학 등 한 단계 높은 곳으로 가는 길목에서다. 요즘 학생들은 자신의 실력과 상관없이 무조건 대기업에 취업하고자 기를 쓴다.
 
그런데 대기업에서 가장 먼저 보는 것이 자기소개서다. 대표적인 대기업인 삼성그룹의 경우 일차 서류 접수 단계부터 항목별로 글자 수까지 제한해가면서 얼마나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고 전문적으로 제시하는지 테스트한다. 이것은 비단 인문계 학생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자연계, 공과대학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부과되는 테스트다.
 
이렇다 보니 인터넷상에는 자기소개서를 대신 써주는 앱이 등장해 글쓰기 고수들이 고수익을 챙기기도 하고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지도하는 글 고수들이 속속 유튜버 채널을 개장해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만약 꾸준히 일기 쓰기를 해 온 사람이라면 이런 관문은 너무나 쉽게 헤쳐나갈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일기를 꾸준히 쓴 학생들은 매우 드물다.

비단 입시나 취업, 논술이나 논문 작성이 아니라도 시대는 바야흐로 글 잘 쓰는 사람이 대접받은 시대가 되었다. 기업에서는 각종 제안서와 업무보고서가 인사고과의 척도가 된다.
법조인들조차 어떤 기소문, 어떤 판결문, 어떤 변론문을 써야 하는지로 고심한다.

많은 사람들이 의지만 가진다면 자신의 재능을 인터넷 세상에 공개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활동한다. 이때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가장 기본 요건이 좋은 글쓰기다. 잘 정리된 논리적이고 깔끔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콘텐츠들은 ‘재미’ 못지않게 인기를 얻는 척도가 된다.

이런 평생의 자산이 일기 쓰기를 통해 얻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학부모 한 명도 일기를 자식들에게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다. 경쟁을 강조하는 사회풍토인 만큼 그에 빗대어 한마디 보태자면 일기는 어떤 도구보다도 경쟁에서 강력한 무기이자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다.

다시 자서전으로 돌아오자. 일기에 기록된 사실들은 자신이 기억한 내용보다 훨씬 다양하게 자신을 돌보게 한다. 심지어 그때 그런 일이 다 있었나 싶은 순간들이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찾아보는 기억에서 사라진 자신의 추억을 찾는 즐거움은 시간이 많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커진다. 그러니 자서전을 쓰고자 한다면 자신이 써놓은 오래 묵은 일기장을 찾아보자. 자신의 인생에서 샛별처럼 빛나는 보석들이 빛을 숨긴 원석의 모습으로 그 속에 숨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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