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원(上)-미추왕릉, 1000년 세월의 더께에 빚어나는 신비감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5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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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덤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미추이사금은 신라 제13대 왕이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7대손으로, 김씨 가운데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위기일발의 외로운 성
적병을 맞아
一髮孤城受敵兵

막을 좋은 계책 없이
무너질 형국이었는데
禦無良策勢將傾

갑자기 신인이 나타나
전쟁을 도왔다니
忽有神人來助戰

지하에서 암암리 거든 줄
바야흐로 알겠네
始知陰騭自冥冥

조선 중기 학자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 권1에 실린 ‘미추왕릉’(味鄒王陵)이란 시다.

성여신은 남명 조식의 제자로, 임진왜란 이후 문란하고 투박해진 풍속을 바로잡는 데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고 산수유람을 즐겼다고 한다. 역사서를 즐겨 읽어 역사에도 남다른 안목을 지녔던 그는 중년에 경주를 유람한 뒤 이곳의 유적을 소재로 27수의 절구를 남겼는데, 이 시는 그 중 하나다.

↑↑ 도심 한 가운데 자리한 수많은 고분들.

◆미추왕릉에서 비롯된 ‘대릉원’이란 이름
경주의 독특한 풍경 중 하나는 도심 한 가운데 거대한 수많은 고분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1000여년 전을 살았던 옛 사람들의 흔적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기에, 시공간을 초월한 묘한 신비감마저 든다.

이들 고분은 노동동과 노서동, 황남동, 황오동, 인왕동에 이르는 평지에 150여 기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이곳은 그동안 노서리 고분군(사적 39호), 황남리 고분군(사적 제40호), 황오리 고분군(사적 41호), 인왕리 고분군(사적 42호) 등으로 각각 따로 관리돼왔으나, 2011년 문화재청이 역사성과 특성을 고려해 사적 제512호 ‘경주 대릉원 일원’이란 이름으로 통합해 관리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대릉원’은 각 고분군 중에서도 가장 큰 무덤 규모를 자랑하는 황남동 고분군이다. 담장을 둘러 공원처럼 관리되고 있는 이곳엔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皇南大塚)을 비롯해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20여기의 고분이 모여 있다.

400여년 전 성여신이 마주했을 미추왕릉도 이곳에 있다. 무덤은 반구형의 봉토분으로 경주 시내에 소재한 고분 중에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된다.

대릉원 남쪽 담장 너머엔 미추왕과 문무왕(文武王), 경순왕(敬順王)의 위패를 모신 숭혜전(崇惠殿)이 있다. 원래 경순왕을 모신 곳으로 임진왜란 때 불탔다가 1794년(정조 18)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었는데, 미추왕의 위패를 모신 것은 1887년(고종 24)의 일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문무왕의 위패를 봉안했다고 한다.

대릉원 일원의 수많은 고분 가운데 미추왕릉을 제외하고는 관련 기록이 부족해 대부분 왕릉으로 비정받지 못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큰 규모 무덤으로 1970년대 발굴조사를 통해 5만점이 넘는 유물이 나온 황남대총조차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지 밝힐 수 있는 근거가 아직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신라가 멸망한 뒤 아무런 기록도 없이 세월이 한참 지난 시점에서, 어느 고분이 누구의 무덤인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경주에 있는 고분 대다수가 인공으로 만든 언덕으로 치부됐다. 반면, 미추왕릉 만큼은 왕의 무덤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듯하다. 다음은 관련 기록이다.

미추왕릉, 경주부(府)의
남쪽 황남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년 간행) 권21-

미추왕릉은 인공으로 만든
산의 사이에 있고, 그 크기는
인공으로 만든 산과 다름이 없다.
읍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나무 베는 것을 금하고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김수흥(金壽興, 1626∼1690)
‘남정록’(南征錄)-

미추왕릉에 이르렀다.
이 능은 죽엽릉(竹葉陵)이라고 하는데, 높이와 넓이를
시조의 왕릉과 비교해보면
또 배가 된다.
-김상정(金相定, 1722~1788)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


이런 이유로 ‘대릉원’이란 이름도 미추왕릉에서 비롯됐다. ‘삼국사기’에 ‘미추왕을 대릉(大陵)에 장사지냈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현대에 와서 붙여진 이름이다.

↑↑ 대릉원 내 유일하게 담장과 문이 설치돼있는 미추왕릉.

◆죽엽군(竹葉軍)과 김유신의 혼백 이야기
무덤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은 신라 제13대 왕이다.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의 7대손으로, 김씨 가운데 최초로 왕위에 올랐다.
 
262년 왕위에 올라 284년 승하할 때까지 23년간 재위했다. 여러 차례 백제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농업을 장려하는 등 내치에 힘썼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미추왕의 무덤과 관련된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제14대 유례이사금(儒禮尼師今) 때 이서국(伊西國) 사람들이 수도 금성을 공격해 왔는데, 도저히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귀에 대나무 잎을 꽂은 군사들(죽엽군)이 나타나 함께 싸워 적을 물리쳤다. 싸움이 끝난 뒤 미추왕릉 앞에 대나무 잎이 잔뜩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선왕(미추왕)이 몰래 도왔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때문에 미추왕의 무덤을 죽현릉(竹現陵)으로 불렀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세월이 한참 지난 뒤인 제36대 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80) 때가 배경이다. 779년 4월 김유신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준마를 타고 있었는데 그 모양이 장군(김유신)과 같았다. 그가 죽현릉으로 들어간 뒤 능 속에서 무엇인가 하소연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내용은 “신(김유신)이 평생 난국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마음이 변함없음에도, 경술년(770)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임을 당하였으니, 신은 이제 먼 곳으로 옮겨 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해 힘쓰지 않을까 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미추왕은 “나와 공이 이 나라를 지키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찌할 것인가. 전과 같이 힘써 달라”며 세 번을 설득했으나 김유신은 끝내 듣지 않고 회오리바람이 되어 무덤으로 돌아갔다.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진 혜공왕은 대신을 보내 김유신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고 공의 명복을 빌게 했다. 또한 나라 사람들이 김유신의 노여움을 풀어준 미추왕의 덕을 기려 삼산(三山, 신라에서 크게 제사를 지내는 세 산)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미추왕릉의 서열을 오릉의 위에 두고 대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미추왕의 영혼이 신라를 돕고,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의 영혼을 달래 나라를 수호했다는 이들 두 이야기를 두고, 김알지의 후손인 미추왕을 호국신(護國神)으로 높여 김씨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부각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보기도 한다. 박씨‧석씨와 달리 김씨의 시조인 알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했기에, 김알지 대신 죽엽군과 김유신의 혼백을 등장시켜 미추왕을 신격화한 것이라는 견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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