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닌 우리들의 이야기, 시대적 고찰이 자서전을 빛낸다

옴파깨이 초등학교 나쁜 선생님
박정희 대통령과 이웅평 대위
입영전야의 막막함이 격한 공감을 얻다

박근영 기자 / 2022년 0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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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피격 사건은 70년대 후반 많은 국민들의 뇌리에 큰 충격을 준 공통 관심사다.

내가 daum블로그 ‘386세대의 아름다운 추억’을 한창 재미있게 쓸 무렵 하루 방문자 수가 보통 만 명이 넘었다. 가끔씩 이슈성 있는 글을 쓸 때면 하루에 10만 명 넘는 방문자가 들기도 했다. 그때는 요즘처럼 스마트 폰이 있을 때도 아니고 오직 컴퓨터로만 접속하던 시대였다. 블로그 자체도 초창기이던 시절이니 지금 유튜버로 치면 하루에 10만명 넘는 조회에 가끔씩 100만명씩도 들어가는 인기 유튜버인 셈이다.

당시의 인기 비결은 다름 아닌 공감대 형성이었다. 그때 내가 주로 쓴 글은 나의 유년기, 소년기, 청소년기, 청년기의 추억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조회수나 댓글이 많이 달리는 것은 그게 단순히 나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닌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의 글이었다. 몇 가지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는 이런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놀이는 주로 딱지치기, 구슬치기, 팽이치기, 병뚜껑 놀이 등이었다. 딱지나 구슬은 내가 블로그 하던 시절 어린이들에게도 어느 정도는 남아 있었다. 딱지는 ‘따조’가 됐고 팽이는 ‘베이 블래이드’로 바뀌긴 했지만 그런대로 나의 아들 대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 병뚜껑 놀이는 완전히 잊혀진 놀이였다.

‘옴파깨이 놀이’는 1970년대를 산 어린이들에게는 딱지나 구슬만큼 일상적인 놀이였을 것이다. 옴파깨이란 병뚜껑을 두드려 펴서 만든 것이다. 병뚜껑이라고만 하면 그 시대 병뚜껑을 모르는 사람들은 도통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콜라병이 지금은 대부분 플라스틱 병에 뚜껑도 손으로 돌려서 따는 것이지만 10년쯤 전까지만 해도 병콜라에 병따개로 따는 뚜껑이 대부분이었다. 이 금속 병뚜껑을 망치로 두드려서 납작하게 편 것이 바로 옴파깨이다. 이 옴파깨이를 블로그에 올렸을 때 반응이 장난 아니었다. ‘이걸 얼마 만에 보느냐?’, ‘우리 시대만의 장난감’, ‘잊혀진 위대한 발견’ 같은 댓글들이 수 십 개 붙었다.

내 경우 초등학교 선생님들에 대해 유난히 나빴던 기억이 많았다. 폭력적이고 야만적이고 뇌물에 충실한 비겁했던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어쩌다 나에게 집중되었는지 몰라도 초등학교 6학년 동안 고마웠던 선생님은 딱 한 분밖에 기억나지 않을 만큼 내 초등학교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무섭고 화나고 아픈 기억의 연속이었다. 사실은 그 글을 블로그에 올리기 전까지는 나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글을 올리고 나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나와 거의 비슷한 정도의 억울함과 공포와 분노를 초등학교 선생님들에게 느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비단 내 또래뿐만 아니라 세대를 막론하고 선생님들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드물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다.

중학교 3학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운의 총탄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생겼다. 지금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상념과 상관없이 당시 중학교 3학년의 소년에게 그 사건은 그야말로 ‘국부’가 사망하는 통한의 사건이었다. 경주시청에 마련된 빈소에 중3짜리 학생이 무얼 안다고 조문 가서 눈물을 줄줄 흘렸다. 물론 블로그에는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지는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기록됐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 중3의 소년이 느꼈던 놀라움과 슬픔이었다. 그 글이 블로그에 올라가자 나와 비슷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댓글이 봇물처럼 이어졌다.

고교시절 교련복 입고 군사훈련 받는다고 황성공원에서 사열하던 기억에도 많은 호응이 따랐다. 특히 고3때이던 1983년 여름 ‘이웅평’이라는 북한 공군 대위가 미그19기를 몰고 귀순한 사건이 있었다. 여름방학 중 학교에 나가 공부하는데 ‘국민 여러분 이것은 실제상황입니다. 경계경보를 발령합니다’며 학교 스피커로 흘러나오던 다급한 민방위청 상황실의 경보가 그 글을 쓰는 순간이나 지금이나 생생하다. 그때 집으로 달려가 다짜고짜 어머니께 교련복을 꺼내 달라며 학도병 의지를 불태웠던 기억도 생생하다. 그 글에도 비슷한 기억을 가진 사람들의 댓글이 우후죽순처럼 따라왔다.

대학시절 최루탄을 마시며 데모대 속을 쫓아다닌 이야기며 불심검문을 당해 극도로 긴장했던 순간의 기억, 학보사 기자로 활동하며 보았던 그 시대의 난맥과 감추어두었던 수많은 추억들도 그 시대를 함께 산 사람들의 공감을 크게 얻었다. 그 당시 독재세력의 강압과 데모대와 전투경찰 사이에서 고뇌하던 나의 모습이 80년대 중반 대학생이었던 사람들과 함께 공감됐다.

매우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시대 군에 가던 청년들에게 필수코스 같이 여겨지던 사창가 총각떼기에 대한 회고는 블로그상에서 일대 전쟁이 일어날 정도로 논쟁이 심한 글이었다. 그 글을 쓴 배경은 그 시대 젊은이들이 입대하던 순간의 막막함과 남자로서 국방의 의무를 마쳐야 하는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힘들게 격리된 젊은이들의 길고 외로운 상념을 쓰고자 했던 것인데 댓글들은 남녀의 성관념에 대한 전쟁으로 바뀌어 있었다.

위에서 나열한 내용들은 대부분 daum의 메인 화면에 노출되었거나 블로그 메인 화면의 ‘가장 많이 본 블로그’ 또는 ‘관심 가는 블로그’에 소개된 내용들이었다. 내가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게 된 것이 2006년부터 2007년 중이었는데 이때만 무려 400만명 가까운 방문자를 기록했으니 실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셈이다.

여하간 이때의 내 블로그는 인터넷 독자들로부터 가공할 인기를 얻고 있었고 그 덕분에 출판사의 제의로 ‘니, 꼬치 있나?’는 책을 낼 만큼 유명세도 얻었다. 첫 번째 책을 초등학교 시절 이전의 내용으로 출판하고 연이어 중학교 시절과 고교시절까지 쭉 책으로 내겠다는 당찬 계획을 세울 만큼 그때 블로그 분위기가 굉장했다. 언감생심 정말 내가 이현세 화백처럼 유명한 글꾼이 될 수 있겠다는 망상에도 사로잡혔다. 물론 예상과 달리 ‘대박 나지 않아’ 2권과 3권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책을 떠나 이렇듯 인터넷 상에서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 내가 쓴 나의 글이 독자들에게 공감을 준 배경에는 내가 쓴 글의 재미나 감동도 물론 있었을 테지만 소재를 잘 선정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짙다. 따지고 보면 그 옴파깨이라는 것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하잘것없는 장난감이었지만 그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석 같은 추억의 산물이었다.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이나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웅평 대위처럼 그 시대 사람들 전부가 기억할 만한 사건 사고들, 최루탄과 총각 떼기 같은 일들이 가진 공감대는 내 글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해 주었다.

비단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자서전을 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시대의 공동의 글 자산들이 알게 모르게 무수히 녹아 있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면서도 동시대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자서전은 한 걸음 더 발전한 자서전으로 빛날 것이다. 나만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이야기로 승화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자서전이 아닌, 동시대의 역사서인 것이다.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자서전 쓰는 사람들이 이런 시대 의식을 가진다면 우리 시대 역사가 더 풍요롭고 재미있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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