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원(下)-천마총과 황남대총-한국 고분발굴사의 ‘대사건’… 1500년 전 타임캡슐 만나다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6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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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릉원 내 천마총 입구 전경.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20여 기의 고분이 모여 있는 대릉원. 이곳 무덤들은 미추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주인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곳엔 한국 고분 발굴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무덤 2기가 있다. 천마총(天馬塚)과 황남대총(皇南大塚)이다. 왕릉급인 두 무덤이 쏟아낸 유물은 유물의 방대함과 화려함으로 1970년대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한국 고분 발굴사의 획기적 ‘사건’
천마총 발굴은 1973년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진행됐다. 1971년 정부는 대통령의 지시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수립하고, 그 일환으로 가장 큰 고분인 황남대총(당시 98호분)을 발굴한 뒤 내부를 복원 공개하기로 했다.

그러나 발굴은 곧바로 시작되지 못했다.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발굴 경험이 없던 당시 고고학계로선 높이가 23m, 길이가 120m에 이르는 황남대총 발굴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고민을 거듭하던 문화재관리국은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바로 옆에 있는 155호분을 연습 삼아 먼저 파보기로 결정한다.

1973년 4월 6일 발굴이 시작됐다. 155호분은 98호분보다는 작았으나 지름이 47m, 높이가 12.7m의 크기여서 이 또한 발굴이 만만치 않았다. 3개월 후인 7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발굴 현장을 찾아 98호분 발굴에 조속히 착수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발굴의 무게중심이 98호분 쪽으로 쏠리는 듯했으나, 같은 달 15일 금제 관식 출토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155호분은 관심을 회복하게 된다. 무덤의 지위도 ‘왕릉급’으로 격상됐다.

하지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8월 22일 부장품 궤짝에 쌓인 말갖춤을 들어올리자 그 아래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모습의 천마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작나무 껍질 위에 찬연한 색조로 유려하게 그려진 그림 2장. 지금까지 전해지는 신라의 유일한 그림 유물 천마도(天馬圖)는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된다.

98호분 발굴은 이듬해인 1974년 7월 7일이 돼서야 시작됐다. 남북으로 무덤 두 기가 붙어 있는 표주박 모양의 쌍분이었기에, 먼저 북쪽 봉분부터 파 들어갔다. 10월 28일 조사원들의 손길이 드디어 목관 내부를 향했다. 목관 전체를 뒤덮은 검은 흙을 제거하자 금관, 금과 유리를 섞어 만든 목걸이, 금팔찌와 금반지, 금허리띠가 가지런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종류나 수량 모두 천마총 등 여타 신라 고분을 압도했고, 무덤 주인공은 5세기 무렵 신라왕으로 확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발굴이 끝나갈 무렵 새롭게 노출된 은제 허리띠 장식에서 ‘부인대(夫人帶)’란 글자가 확인되면서 무덤 주인공의 지위는 왕비로 바뀌게 된다.

발굴이 끝난 후엔 이 무덤 속 유물 가운데 해외에서 들여온 유물도 다수가 포함돼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구려산 금귀걸이, 서역산 보석 장식 금팔찌, 중국 남조(南朝)에서 들여온 청동다리미와 도자기, 동로마와 페르시아산 유리그릇 등이 그것이다. 황남대총은 한 번 무덤을 쓴 다음 다시 사람이나 물품을 추가로 묻을 수 없는 구조인 만큼, 무덤 속 유물들은 무덤 주인이 묻힐 때 함께 묻힌 것이었다.

↑↑ 1976년 1월 98호분 발굴 후 복원 모습. <경주신문 DB>

◆유일하게 내부를 볼 수 있는 신라고분 천마총
천마총에선 금관을 비롯해 모두 1만1000여점이, 황남대총에선 5만8000여점의 유물이 각각 출토됐다. 이렇게 많은 유물이 쏟아졌지만, 이들 무덤의 주인은 끝내 밝혀내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관련당국은 대표적인 출토 유물의 이름을 무덤 이름에 활용하기로 했다.

1974년 155호분의 천마총 명명(命名)이 결정된 이후 예상치 않은 일도 벌어졌다. 1981년 경주 지역 김씨 문중에서 “155호분은 분명 신라 왕실의 무덤일 텐데, 왜 하필 말의 무덤이라 이름을 붙이느냐”며 국회에 청원을 낸 것이다. 천마총이라고 하면 천마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들린다는 의미였다. 이를 두고 문화재위원회가 재심까지 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98호분은 좋은 이름을 이미 다른 고분이 다 써버린 탓에 그냥 황남대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황남동의 대형 무덤이라는 뜻이다. 능(陵)은 왕과 왕비의 무덤에만 붙인다. 총(塚)은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 붙이는 명칭이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왕이나 왕비급의 무덤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아니어서 아쉽게도 총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총은 신라 고분 가운데 내부에 들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다. 당초엔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대총 내부를 공개할 계획이었으나, 결국엔 천마총 내부를 공개하는 것으로 바뀌게 된다.

천마총 내부는 무덤 내부 구조와 함께 출토 상황을 보여준다. 무덤의 한가운데를 동서로 절개한 단면을 보여주는데, 돌무지(積石)와 덧널(목곽·木槨), 널(목관·木棺)의 규모나 구조, 전체 크기 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1970년대에 꾸민 무덤 내부가 발굴 당시 실제 모습과 다소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일었다. 이에 따라 내부 전시 공간을 발굴 당시 모습에 최대한 가깝게 개선해 2018년 다시 문을 열었다.

↑↑ 신라역사관 제2전시실에 있는 천마총 출토 금관과 금허리띠.

◆6만9천여 유물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천마총과 황남대총 유물은 거의 대부분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상설전시실인 신라역사관 내 신라 황금문화를 집중 조명한 제2전시실에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 발굴한 유물을 만나볼 수 있다.
황남대총 코너에선 관 모양 나무 틀 속에 피장자가 착용했을 유물을 배치하고 유리를 얹었다. 금동관 부속품을 피장자의 머리 방향에 쓰러뜨리고 허리 부분에 금제허리띠를 풀어놓는 식이다. 그리고 주변 진열장엔 무덤에서 나온 엄청난 양의 부장품을 쌓아놓듯 전시해, 당시 권력자의 힘이 어느 정도 막강했는지를 보여준다.

천마총 코너는 사진촬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공간이다. 캄캄한 방 한가운데 천마총에서 나온 금관과 금허리띠 등 단 2점만 전시하고 있는데, 금관이 성인 눈높이쯤에 있어 얼굴 구도를 금관에 맞춰 사진을 찍으면 마치 금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찍힌다. 좀 더 그럴듯한 사진을 남기기 위해 여러 번 찍는 이들도 있고, 사진으로나마 금관을 써보려고 순서를 기다리기도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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