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감과 생기 불어넣기! 자서전에도 ‘대화가 필요해’

대화체와 의성어의 사용도 글에 속도를 붙이고 부연설명을 줄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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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은 남 혹은 나를 객관화시켜서 바라보다 보니 대부분 내용이 묘사와 서술로 진행되기 일쑤다.
그러다 보니 문장 전편 혹은 책 전편이 무미건조하고 따분해질 수밖에 없다. 도무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자서전이라고 해서 문학적 표현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고 자서전이라고 해서 소설처럼 재미있게 쓰지 말라는 법 없다. 다양한 문장 기법을 동원해 자서전을 꾸밀수록 읽는 재미가 더 커진다.

가장 대표적인 기법이 대화체 사용이다. 어려울 것도 없다. 누군가 말한 내용을 그대로 “ ”안에 넣는 것이다. 이렇게 대화체를 사용하면 두 가지 장점이 있다. 글에 긴장감이나 재미를 준다는 게 그 하나고 대화에 대해 길게 부연해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역시 예를 들어 설명해 보겠다.

『문디바위는 척 보기에도 높이가 2미터는 넘어 보이는 바위였다. 그 바위 위에서 4-5학년 된 형들이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물이 불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수면에서 바위 위까지는 어른 키보다 훨씬 높았다. 형들이 그런 곳에서 나보고 뛰어내리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라다가 빼라도 뿌지거지믄 우짜노?”

내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변명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야, 밑이 전신만신에 물인데 빼가 와 뿌지거지노? 이 자슥, 니, 꼬치 없제?”

꼬치란 것의 의미는 너무나도 뻔했다. 나는 기운 없이 내 사타구니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형들에 비해 턱없이 작아 보이는 내 고추였다. 그런 고추가 제 스스로도 내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인지 고개를 떨군 채 물살을 따라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야, 니 그라믄 조기서는 띠내릴 수 있겠나?”

형들이 가르친 곳은 꼭대기보다는 좀 낮은 곳이었다. 대충 3-40센티는 낮아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조차도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형들이 마치 자기가 못뛰겠다고 대답한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 댔다. 인뜨라 이거는 꼬치도 없다!”』

위 글은 내가 쓴 ‘니 꼬치 있나?’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이 인용을 보면 묘사와 대화가 적절히 들어가 있어서 마치 소설을 보거나 희곡을 보는 것처럼 전반적인 그림이 그려진다. 그런데 만약 이것을 일반적인 서술체로만 썼다고 가정해보자.

『문디바위는 척 보기에도 높이가 2미터는 넘어 보이는 바위였다. 그 바위 위에서 4-5학년 된 형들이 아래로 뛰어내리고 있었다. 물이 불어 있긴 했지만 그래도 수면에서 바위 위까지는 어른 키보다 훨씬 높았다. 형들이 그런 곳에서 나보고 뛰어내리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그러다 뼈라도 부러지면 어떻게 하느냐면서 다 죽어가는 소리로 변명했다. 어떻게 해서라도 빠져나가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자 형들이 바위 밑이 모두 물인데 뼈가 왜 부러지느냐고 빈정거렸고 심지어 나더러 고추가 없다고 놀려댔다.
꼬치란 것의 의미는 너무나도 뻔했다. 나는 기운 없이 내 사타구니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필이면 형들에 비해 턱없이 작아 보이는 내 고추였다. 그런 고추가 제 스스로도 내 얼굴 보기가 민망해서인지 고개를 떨군 채 물살을 따라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형이 조금 낮은 곳을 가리키면서 거기서는 뛰어내릴 수 있느냐고 물었다.

형들이 가르친 곳은 꼭대기보다는 좀 낮은 곳이었다. 대충 3-40센티는 낮아 보이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조차도 장난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형들이 마치 자기가 못뛰겠다고 대답한 듯이 하늘을 쳐다보며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나에게는 고추가 없다는 식으로 단정해버렸다.』

이 두 글을 비교해 보면 대화체가 얼마나 유용하고 긴장감 있는지, 자잘한 설명이 필요 없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대화체를 사용하면 글을 읽는 속도감도 커지고 장면 전개가 군더더기 없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아래 쪽 서술체로 쓴 글을 읽으면 분명히 뜻은 전달이 되지만 위글에서 대화체를 사용한 것에 비해 훨씬 긴장감이 떨어지고 글 읽는 재미도 덜할 것이다.

방금 위에서 자서전도 소설처럼 쓸 수 있다고 말했는데 실상 많은 소설가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쓴 사례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자서전이 소설이 될 수 있고 수필이 될 수 있다. 기행문도 될 수 있다. 자서전이라는 분류는 다만 하나의 형태일 뿐 그 자서전이 품고 있는 문학적 표현방식은 뭐가 돼도 상관없다. 대화체를 사용하는 것이 꼭 소설이나 희곡에만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

여기서 대화체라고 했을 때 반드시 대화의 내용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의성어들도 대화처럼 사용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아래 예를 다시 보자.

『아버지가 온 몸의 힘을 모아 덫을 물어 당기자 덫과 함께 누나와 엄마, 나까지 한쪽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챙그렁, 타탁!’
 
바로 아까, 누나가 덫에 걸려들 때의 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그러자 갑자기 아버지가 붕 떠는 듯싶더니 ‘퍽’하는 소리와 함께 덫이 튀어 오르며 아버지의 가슴께를 정확히 치고 물어버렸다.

‘찌이익......!’
 
너무나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입으로 피를 쏟아내며 절명해버렸다. 엄마와 나는 극도로 비참한 상황에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망연하게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누나가 깨어나더니 구슬프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엄마, 동생 데리고 도망가세요. 곧 사람이 올 거야. 나는 이제 틀렸어. 어차피 죽게 될 거야. 아버지가 나 때문에....나 때문에.....”

누나는 말끝을 채 맺지 못하고 다시 까무라쳤다.』

윗글은 내가 쓴 단편소설 ‘살생유택’에서 따온 것인데 이 역시 생쥐들에 얽힌 나의 자전적 이야기를 소설로 꾸민 것이다. 예문 속에 등장하는 대화체나 ‘챙그랑 타닥’, ‘찌이익...!’ 같은 인용들은 모두 의성어들로 글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직접적인 도구로 사용됐다.
 
이번에 든 예는 굳이 서술체로 풀어 놓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글 속에서 긴장감과 속도감을 주는 방법이 대화체 혹은 따옴표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쓱 보면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칫 지나친 대화의 남발과 지나친 따옴표의 남발은 글의 순서를 놓치게 하고 대화자를 헷갈리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약도 지나치게 쓰면 되려 독이 된다. 서술형과 대화체, 따옴표를 적절히 조절해서 쓰면 읽기에 훨씬 부드럽고 재미있는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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