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혁거세 탄생 신화(神話), 눈에 보이는 역사(歷史) 되다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7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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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신라의 상징적 유적지 나정. 혁거세의 무덤으로 알려진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1㎞ 거리,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공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사진제공=김운 역사여행가>


신라 개국의 시조 혁거세
新羅始祖赫居世

알을 깨고 나온 자태 빼어나
剖卵生成岐嶷姿

동국의 천 년 왕업 창건하였으니
東國千年王業創

지금도 사람들 탄생이 기이하다하네
至今人道誕生奇


조선 중기 학자 성여신(成汝信, 1546~1632)의 시문집인 ‘부사집’(浮査集) 권1에 실린 ‘나정’(羅井)이란 시다. 다음은 ‘삼국유사’ 속 나정에 관한 기록이다.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옆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에 일고 무릎을 꿇은 흰 말이 있었다. 그곳으로 찾아가 살펴보니 보랏빛 큰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자 길게 소리쳐 울다가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알을 깨뜨려 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 아이를 동천에서 목욕을 시키니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절로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밝게 빛났다.

이 두 글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나정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탄생 신화가 깃든 신라의 상징적 유적지다. 혁거세의 무덤으로 알려진 오릉에서 남동쪽으로 1㎞ 거리, 소나무 숲 속에 감춰진 공터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4차례 발굴조사로 드러난 역사적 실체
나정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2년부터 2005년까지 네 차례 있었다. 발굴조사 이전엔 일제강점기에 새로 세운 유허비(遺墟碑)와 전각이 있고, 전각의 북쪽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 초석 다섯 개가 있었다. 전각과 화강암 초석 둘레엔 담장이 둘러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전각의 북쪽에 있는 네모난 초석 중 중앙에 있는 가로 세로 1.3m짜리 돌덩이가 우물이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다.

발굴 결과 이례적인 팔각 건물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결과였다. 더구나 팔각 건물터에선 ‘義鳳四年’(의봉 4년, 679년)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발견돼 문무왕의 삼국통일 직후 증축이 이뤄진 사실도 확인됐다.

팔각형 건물의 용도에 대해선 많은 의견이 있었으나, 출토된 기와 상당수가 월성과 안압지, 황룡사 터 등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하고, 당삼채나 유약이 발린 도기 등이 출토된 것으로 미뤄 제사와 관련된 건물로 추정됐다. 또, 유적에서 수습된 ‘生’(생)자가 새겨진 기와 역시 시조의 탄생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됐다.

사실 나정은 조선시대부터 진위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초기 기록을 불신한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 역시 나정을 역사가 아닌 허구로 여겼다. 그러나 신라시대 팔각 건물터가 발굴되면서 나정은 역사적 실재라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특히 초기 철기시대 ‘제의용 환호’(環濠, 마을이나 제단을 둘러싼 도랑)가 발견돼 눈길을 끌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기록된 박혁거세의 건국 연대(기원전 57년)와 비슷한 시점에 나정이 신성시됐음을 보여주는 근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우물이 있던 자리라고 전해지던 중앙의 화강암 초석 자리는 우물 유적이 아니라 팔각형 건물 중앙부에 나무 기둥을 세우기 위한 초석 자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대신 이 초석 자리에서 남쪽으로 4~5m가량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구덩이 터가 발견됐다. 발굴단은 이 구덩이 터에 대해 강돌을 밑에 설치한 것 등을 근거로, 처음엔 실제 우물이었으나 후대에 매립된 것으로 판단하고 발굴보고서를 작성했다.

↑↑ 1920년대 후반 나정 모습. 사진제공 경주문화원.

◆나정, 우물이 아닐 수도
학계에선 팔각 건물이 국가 제의시설이라는 발굴단의 의견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다. 반면, 발굴단이 우물터로 지목한 유구에 대해선 건물 기둥의 흔적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많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선 지금의 나정을 신라시대의 나정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발굴단이 우물터라고 주장한 구덩이 유적이 기둥 주초 시설이므로, 이곳이 신라시대의 나정이 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이들의 주장은 얼마나 타당할까.

이들을 포함해 대다수 사람들은 나정(蘿井)이 ‘우물’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어느 대목에도 나정이 우물이란 언급은 없다. 박혁거세가 천상(天上)에서 백마(白馬)가 나정이란 곳으로 운반해온 자주색 알(紫卵)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이 전부다.

나정을 우물로 인식한 것은 조선시대 이후 일이다. 이를테면 조선 현종 10년(1669년)에 편찬한 경주지역 지리지인 ‘동경잡기’(東京雜記) 권2 고적(古蹟)조에서 나정을 소개하면서 ‘알영정’(閼英井), ‘금성정’(金城井) 등 우물이라는 게 명백한 곳과 함께 언급하는 식이다.

우물을 뜻하는 ‘井’(정)이란 글자가 들어간다고 해서 이곳이 우물이라는 근거는 될 수 없다. 같은 논리대로라면 전북 정읍(井邑)은 우물 속에 들어앉은 도시가 된다.

‘정’이란 글자는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된 땅을 지칭하기도 한다. 저잣거리를 시정(市井)이라 하는 까닭은 그곳에 우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거리가 ‘十’자 모양으로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의 주(周)나라에서 시행했다고 하는 토지 구획제도인 ‘정전제’(井田制)도 마찬가지다.

나정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처음으로 씻긴 곳이 동천(東泉)이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 또한 나정이 우물이 아니라는 또 다른 증거다. 나정이 우물이라면, 우물에서 태어난 아이를 다른 곳(동천)에 데려가 씻길 이유가 있었을까.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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