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김씨 왕조 시조 탄생설화 깃든 숲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8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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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림의 아름다운 계절
안개가 흐릿한데
(始林佳期淡烟微)

한낮 금닭은
울지도 날지도 않는구나
(白日金鷄際不飛)

석궤에 가을바람 일자
지난 일이 처량하고
(石櫃秋風凄往事)

붉은 등나무 꽃 아래
이슬비가 흩날리는구나
(紫藤花下雨罪罪)

조선 후기 경주 양동사람 이헌하(李憲河, 1701~1775)가 경주 계림(鷄林)을 노래한 ‘계림’이란 제목의 시다. 계림은 경주 김씨 시조인 김알지(金閼智)가 태어난 곳으로 전해진다.

↑↑ 김알지 탄생설화가 깃든 계림숲 내 모습.

◆김알지 탄생설화 전하는 신성한 숲
탈해이사금 9년(65) 3월의 일이었다. 밤중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에서 닭 울음소리를 들었다. 날이 밝자 호공(公)을 시켜 살펴보게 했다. 가서 보니 금빛이 나는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의 이야기를 들은 왕이 궤짝을 가져와 열게 하니, 남자 아이가 그 안에 있었는데 용모가 뛰어나게 훌륭했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에 일러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준 것이라 하고 거두어 길렀는데,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 이름을 ‘알지’(閼智)라고 불렀다.

또, 금색 궤짝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씨라 하였으며, 알지가 발견된 ‘시림’의 이름을 ‘계림’(雞林)으로 고치고, 그것을 국호로 삼았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다.

한편, ‘삼국유사’엔 전체적인 줄거리는 비슷하나 ‘삼국사기’와는 다소 다른 내용도 보인다. ‘호공이 밤에 월성 서리(西里)를 지나다 시림에서 큰 빛을 보았는데, 하늘에서 땅으로 드리운 자주색 구름 속에 황금 상자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었고 거기에서 빛이 나왔다. 또한 흰 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왕이 직접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삼국사기’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알지’라는 이름이 당시 말로 ‘어린아이’(小兒, 소아)를 뜻한다고 언급한 부분도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그리고 다음 내용이 이어진다.

‘(탈해)왕은 길일을 가려 그를 태자로 책봉했으나,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에게 물려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았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았으며, 아도는 수류(首留)를, 수류는 욱부(郁部)를, 욱부는 구도(俱道)를,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으니, 미추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됐다’

이에 대해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이 이처럼 다소 차이를 보이는 것은 전자가 국가나 왕실의 역사를 기록한 데 반해, 후자는 신이한 이야기까지를 포함해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계림숲 서편에 자리하고 있는 내물왕릉.

◆신라왕실의 본산…56왕 중 38왕이 경주 김씨
성 밖 문묘(文廟, 공자를 모신 사당, 향교) 옆에는 몇 이랑의 황폐한 언덕에 늙은 나무가 쓸쓸하게 서 있으니, 곧 닭 우는 소리가 들렸던 옛 숲이다.
-홍성민(洪聖民, 1536~1594), 계림록(鷄林錄)

시림(始林) 앞에 이르러 말에서 내리니 우물이 있었다. 그 가운데 8개의 모서리가 있는데, 또한 돌로 덮어 놓았다. (중략) 시림은 지금 향교 곁에 있는데, 특별히 볼 것이 없었지만 우리나라 김씨가 나온 땅이기에 방황하면서 오래도록 떠날 수 없었다.
-김상정(金相定, 1722~1788), ‘동경방고기’(東京訪古記)


시림은 경주부 남쪽 4리쯤에 있는데, 다만 보이는 것은 늙은 수목들이 무성한 것뿐이다.
-박종(朴琮, 1735~1793), ‘동경유록’(東京遊錄)

오늘날 경주를 방문한 관광객 상당수는 계림을 스쳐지나가거나 아예 둘러보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계림은 경주를 찾은 선비들이 빼놓지 않고 방문하는 위상 높은 사적지 중 하나였다.
학계는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김씨 왕실의 시조 신화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을 미추왕대 이후로 본다. 또한 신라의 56왕 가운데 38왕이 김씨였으니, 그 시조인 알지가 태어난 계림은 신라에서 가지는 위상도 그만큼 높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계림의 이러한 상징성은 그것이 나라 이름으로 사용된 점이나 이후 경주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된 것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충렬왕 34년(1308)부터 조선 태종 15년(1415)까지 경주의 명칭은 ‘계림부’(鷄林府)였다.

↑↑ 계림숲 안에서 바라보이는 첨성대 모습.

◆오래된 숲, 유구한 세월의 풍상
계림은 1963년 사적 제19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첨성대에서 월성 방향으로 펼쳐진 넓은 잔디밭 사이로 난 길 오른편에 계림이 있다.

이곳엔 조선 순조 3년(1803)년에 세운 ‘계림김씨시조탄강유허비’(鷄林金氏始祖誕降遺墟碑, 계림 김씨 시조가 태어난 곳에 세운 비)가 남아있다. 비문(碑文)은 당시 규장각 직제학으로 있던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이 지었다고 한다. 김알지의 탄생에 관련된 설화와 김알지 이후의 김씨 왕가의 계보‧치적, 글을 쓰게 된 동기 등이 담겨 있다.

계림을 거닐며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눈에 띄는 큰 무덤 하나를 만나게 된다. 신라 첫 김씨 왕이었던 제17대 미추왕의 조카였던 내물왕(내물마립간, 356~402)의 무덤이다. 그는 비록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도움을 받으며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 아래 놓이게 만들었지만, 왕의 호칭을 이사금에서 ‘대군장’이란 의미의 마립간으로 바꾸고 김씨왕위 세습을 확립했다. 이후 52대 효공왕까지 김씨 왕조의 시대를 연 것이다.

내물왕릉 인근까지 이어지는 계림 숲은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느티나무와 고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사시사철 사진가들의 발길을 불러 모은다. 특히 가을이면 빽빽한 단풍이 화려한 색을 뽐낸다. 숲 속 오솔길을 따라가다 보면 교촌마을과 경주향교, 월정교 등도 만날 수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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