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옥룡암과 이육사(2)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8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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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가 1936년, 1942년 드나들었던 옥룡암 입구.

사실 이육사는 옥룡암으로 내려오기 전 가혹할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폐결핵으로 6개월간 성모병원 입원 후 퇴원하였으며, 부친의 죽음과 큰형 이원기의 죽음이 연이어 있었다. 그리고 의열단 혁명동지 윤세주의 전사(戰死)가 있었다.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그는 이곳 옥룡암에서 병약한 시인으로서 한적함을 즐겼을지 모르나, 한편으로는 독립운동가로서는 뜨거운 가슴은 멀리 대륙의 독립운동하는 동지들을 생각했을 것이다. 몸이 좋아지면 달려가리라 그렇게 마음을 세우고 있었으리라. 그의 생애에서 옥룡암의 시간들은 몸을 추스르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다음을 기다리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이육사의 수필 ’계절의 표정’ 가운데 마지막 부문에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 옥룡암 안으로 들어서면 삼층석탑과 대웅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벗들이 나를 달랬다. 전지 요양을 하란 것이다. 솔깃한 말이라 시골로 떠나기로 결정을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어디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 수 없었다. 조건을 들면 공기란 건 문제 밖이다. 어느 시골이 공기 나쁜 데야 있을라구. 얼마를 있어도 싫증이 안 날데라야 한다러면 경주로 간다고 해서 떠난 것은 박물관을 한 달쯤 봐도 금관, 옥적(玉笛), 봉덕종(奉德種), 사사자(砂獅子)를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날 까닭은 원체없다. 그뿐인가, 어디 일초 일목(日草一木)과 일토 일석(一土一石)을 버릴 배 없지마는 임해전(臨海殿) 지초(支礎)돌만 남은 옛 궁터에서 가을 석양에 머리칼을 날리며 동남으로 첨성대를 굽어보면 아테네의 원주(圓柱)보다도, 로마의 원형 극장보다도 동양적인 그 주란 화각(朱欄畵閣)에 금대 옥패(金帶玉佩)의 쟁쟁한 옛날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거기서 나의 정신에 끼쳐 온 자랑이 시작되지 않았느냐? 그곳에서 고열로 인해 죽는다고 하자. 그래서 내 자랑 속에서 죽는 것이 무엇이 부끄러운 일이냐? 이렇게 단단히 먹고 간 마음이지만, 내가 나의 아테네를 버리고 서울로 다시 온 이유는 시골 계신 의사 선생이 약이 없다고 서울을 짐짓 가란 것이다. 서울을 오니 할수없어 이곳을 떼를 쓰고 올밖에 없었다. -수필 ‘계절의 표정’ 일부

↑↑ 1938년 불국사 연화교, 칠보교에 올라 찍은 사진. 좌로부터 최용, 신석초, 이육사. <사진=이육사 문학관>

아테네 로마보다 더 좋은 경주를 두고 약 때문에 서울로 올라올 수밖에 없는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폐허 같은 고도 경주의 모습을 그는 망국의 마음을 읽었으리라. 무너진 유적을 둘러보며 떠올렸던 쟁쟁하게 울려오는 옛 소리는 아마도 선인들의 외침이거나 민족부흥의 종소리였을 것이다. 그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것은 독립과 민족성 고취였을 것이다. 그 옛날 화랑들의 기개가 그리웠을 것이다. 일제 식민통치가 그래서 그는 이곳에서도 몸을 추스르며 벗을 그리워하며, 쉽게 시가 써지지 않는 고심을 하며 한편으로는 멀리 중국 대륙의 의열단 동지들이 생각하며 그리웠을 것이다. 
이렇듯 경주 남산 옥룡암은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곳이다.

이육사는 이곳에서 3개월 정도 머물다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신석초와 나들이하면서 중국으로 가야만 할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1943년 초봄에 북경으로 갔다가 그해 4월 귀국했다 6월에 체포되어 다시 북경으로 압송되어 감옥에서 40세로 생을 마감했다.

↑↑ 이육사시고(李陸史詩稿)라는 책이름과 의의가패(依依可佩) 라는 글귀, 그리고 난초 그림을 통해 이육사의 필체와 그림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사진=이육사 문학관>

옥룡암은 외지의 문인들이 경주에 오면 많이 찾는 곳이다. 올해만 해도 몇 차례 안내자를 자청해서 동행한 적 있다.
 
시인, 작가들이 이곳을 찾는 까닭은 무엇일까? 절 구경도 구경이지만, 이육사의 시 정신과 문학적 향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절은 자꾸만 쇠퇴해져 가는 느낌이다. 태풍에 상처 난 흔적들은 개보수하면 되겠지만,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옥룡암을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발굴하고활용하지 못함이 아쉽다.

이곳에다가 민족시인 이육사의 시 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문학적 창작공간으로 꾸며 보는 것도 좋겠다. 더군다나 옥룡암은 한때 지역의 인재들이 고시 공부를 하던 명소로 유명하다. 지금도 공부방 흔적은 그대로 남아있기에 잘 활용하여 문학 레지던스(입주작가 창작촌) 공간으로 변화를 모색해보면 어떨까? 아니면 시비(詩碑)를 세워 육사의 문학정신을 기리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것이다. 이곳에서 육사 백일장, 과 육사시 시낭송대회 등 어떤 형태로든 뜻을 기리고 추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작은 암자에 사람들이 붐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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