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上)-3만3천여 유물 쏟아진 통일신라의 타임캡슐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9월 0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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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궁과월지 야경.

못을 뚫어 물을 채우니
물고기 소라 자라고
(鑿池爲海長魚螺)

물길을 당겨 중심에 대니
콸콸 흐르네(引水龍喉勢岌峨)

여기서 놀이하다
신라는 나라를 잃었는데
(此是新羅亡國事)

지금은 봄물로
좋은 벼가 자라나네
(而今春水長嘉禾)

조선 초 학자이자 문신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시문집인 ‘매월당시집’(梅月堂詩 集)에 실려 있는 ‘안하지 옛 터’(安夏池舊址)란 시다. 그가 노래한 ‘안하지’는 월성 북동쪽에 있는 ‘월지’(月池)다.

◆‘안압지’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
‘동궁과 월지’는 대중들에게 ‘안압지’(雁鴨池)란 이름으로 더욱 친숙한 유적이다. 하지만 안압지는 사실 신라 때 명칭이 아니라,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처음 등장한다.

‘기러기와 오리가 날아드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신라가 멸망한 이후 연못은 웅덩이처럼 변했고,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이를 ‘안압지’로 부르면서 시를 쓰는 등 기록을 남긴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나오기 전 김시습이 ‘안하지’란 표현을 쓴 것으로 미뤄 안압지와 비슷한 발음을 가진 표현이 15세기 무렵부터 사용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이곳에선 1975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의봉4년개토’(679)명 기와와 ‘조로2년’(680)명 전돌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을 통해 연못 주변 건물지가 문무왕 19년(679)에 지은 동궁(東宮)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안압지란 명칭은 1982년 당시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에 의해 ‘안압지는 월지’라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그 명칭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이후 안압지에서 나온 ‘동궁아일’(東宮衙鎰)명 자물쇠, ‘세택’(洗宅)명 목간, ‘용왕신심’(龍王辛審)·‘신심용왕(辛審龍王)’명 접시 등에 새겨진 명문이 ‘삼국사기’ 직관지에 나오는 동궁 소속 관청 가운데 ‘세택’(洗宅), ‘월지전’(月池典), ‘월지악전’(月池嶽典), ‘용왕전’(龍王典) 등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특히 ‘월지악전’(月池嶽典)은 조경을 담당한 관청인데, 소속된 관리 중 수주(水主, 둑과 연못을 관리하는 사람으로 추정)를 뒀다는 기록으로 미뤄 이곳에서 연못을 관리했고 연못 이름이 월지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에 따라 1963년 사적 18호로 지정됐던 안압지를 포함한 신라왕궁 별궁터 ‘경주 임해전지’는 2011년 문헌기록과 출토유물, 발굴조사 내용 등의 재검토를 통해 ‘동궁과 월지’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지난 2017년 공개한 통일신라 시기 수세식 화장실로 추정되는 석조물.

◆3만3000점 신라유물 쏟아진 월지
동궁과 월지에 대한 첫 발굴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이뤄졌다. 1925년 8월 25일자 동아일보는 동궁과 월지 발굴과 관련한 ‘고적 진품 발견-음석으로 만든 도랑’이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고적을 연구하기 위해 경주에 가있는 일본 제국대학 교수 원(原) 박사가 지난 20일 경 안압지 부근에서 음석(陰石·오목한 돌)으로 만든 길이 오십일 간(間)의 곡선상의 도랑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고적 중에도 매우 진귀한 것으로 군 당국에서 발굴하는 중이라는 내용이다.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정부는 경주종합개발계획 10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그 일환으로 경주의 여러 유적과 시의 외관을 정비하면서, 안압지도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1974년 11월 준설공사가 시작됐다.

준설 작업 이전 월지는 가끔씩 낚시를 하는 이들이 찾는 넓은 연못에 불과했다. 그러나 준설작업이 시작된 뒤 이곳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발견됐다. 양수기로 연못의 물을 빼낸 다음 포클레인으로 진흙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다량의 유물이 섞여 나왔고 월지 호안석축의 일부가 드러났다. 공사는 즉시 중단됐고 이듬해인 1975년 3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전신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 주도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2년여의 발굴조사 결과 전체 면적이 1만5658㎡(4738평)에 이르는 대형 연못과 그 안에 독립된 3개의 섬이 발견됐다. 연못 가장자리와 섬 외곽에 석재를 쌓아 만든 호안석축과 물이 들어오고 빠져 나가는 입수구·출수구 시설도 확인됐다. 못의 서쪽과 남쪽에서는 대형 건물지를 비롯한 31곳의 건물터도 모습을 드러냈다.

안압지 발굴 당시 조사원으로 참여했던 윤근일 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준설작업 이전 안압지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고 가운데 물이 고여 있는 정도의 상황이었다”며 “그때는 그냥 하나의 못으로만 생각했지 그 안에 돌로 석축을 쌓아서 정연하게 만든 호안이 나올 줄은 아무도 몰랐다”고 회상했다.

당시 출토된 유물은 3만3000여점에 달했다. 이 가운데 1만5000여점이 완전한 형태로 세상 밖에 나왔다. 이처럼 많은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연못 바닥 진흙 덕분이었다. 진흙은 마치 타임캡슐처럼 1200여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유물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가 토해냈다.

유물은 대부분 연못의 서쪽 건물지를 중심으로 호안석축 내부 반경 6m 거리 내의 바닥토층에서 출토됐다. 종류는 기와, 벽돌, 건축부재, 불상, 그릇, 숟가락, 배, 주사위, 금동제 가위, 목간 등으로 다양했다. 출토품들은 경주 지역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품과는 달리 신라 궁중생활을 엿볼 수 있는 실생활 용품이 많이 출토됐고, 중국과 일본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유물도 나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특히 1975년 4월에는 월지의 중도와 소도 사이에서 뒤집힌 모습의 나무로 된 배가 발견돼 화제가 됐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배 중 가장 오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모습으로 출토돼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들 유물은 통일신라의 건축·불교미술·생활상·오락문화 등 통일신라 초기 신라인의 생활을 엿보고, 중국·일본과의 문화교류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통일신라 수세식 화장실 유적 발견 ‘화제’
발굴조사 이후 1980년 9월까지는 유적의 정비·복원 사업이 진행됐다. 발굴 당시 출토된 건물 부재를 기초로 해서 3동의 건물을 복원했고, 나머지 건물 터의 기둥자리에도 화강암을 다듬은 초석을 배치하는 등 오늘날 볼 수 있는 동궁과 월지 유적의 모습을 갖췄다.

동궁과 월지 입구에 들어서면 연못 서편으로 복원된 건물 3동이 있다. 사실 복원 당시 신라 건축에 관한 자료·정보 등이 부족해 당대 건축물 형태로 완벽하게 복원한 것은 아니더라도, 최대한 출토된 부재를 기초로 해 복원했다고 한다. 기둥 위 지붕을 받치기 위한 공포의 부재인 첨차와 주두, 난간을 장식한 살대 등은 모두 출토유물을 복원한 것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통일신라 왕경의 구조와 성격을 확인하기 위해 동궁과 월지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 성과로 2017년에는 통일신라 시기 수세식 화장실로 추정되는 석조물과 터널형 수로시설을 발굴해 세간을 놀라게 했다.

지금까지 동궁과 월지에서 나온 유물 일부는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발굴 당시 화제를 모았던 목선도 보존처리를 마치고 월지관에 전시돼 있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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