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 시인의 경주인문학산책] 소년 김동리의 서산(西山)과 서천(西川)

김동리 자전적 에세이, ‘꽃과 소녀와 달과’ 속의 경주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0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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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천 건너 부엉듬, 부엉더미 마을 뒤쪽으로 선도산, 송화산, 옥녀봉


어릴 적 우리들은 형산강을 강이라 하지 않고 그냥 서천이라 했다. 편하게 그냥 서천내라고 불렀다. 시내를 감싸고 흐르는 북천과 남천 또한 북천내, 남천내 이렇게 불렀다. 훨씬 친근하고 정감이 묻어나는 이름들이다.

산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천 건너편 산을 그냥 서산이라 불렀다. 선도산, 송화산, 수도산, 옥녀봉 등을 구분하지 않고 편하게 서산으로 불렀다.

한국의 대표작가 동리에게 서산과 서천은 일반적인 산과 강이 아닌 특별하게 다가오는 산이었다. 서산과 서천이 없었다면 우리 국토에 문학의 씨를 뿌리지 못했을 것이다.

김동리 문학을 한단어로 요약하면 바로 ‘죽음’일 것이다. 대표작 ‘무녀도’를 비롯한 여러 작품 속에 죽음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죽음은 동리 문학의 정중앙을 관통하는 메인 테마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대다수 소설 속에서 죽음은 어김없이 모습과 장면을 달리하며 나타난다. 소설뿐만 아니라 많지 않은 그의 시에도 제일 많이 등장하는 시어가 ‘이승과 저승’이다. 과장하면 시 작품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무방할 만큼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가고 있다. 모든 것은 옆집 선이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된다.

다섯 살 되던 이른 봄 살구꽃이 피기도 전, 골목에서 소꿉놀이하며 놀던 옆집 선이가 홍역으로 죽었다. 거적에 싸인 선이를 지게에 지고 나서는 뒤를, 그녀 아버지가 삽을 들고 따라나서는 골목에 선이 엄마의 울부짖는 소리와 삽짝을 벗어나 서천 징검다리 건너 서산 솔숲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소년은 강 언덕에서 젖은 눈망울으로 지켜보았다. 최초로 목격한 죽음은 바로 첫사랑의 감정을 지녔던 어린 소녀의 죽음이었다. ‘우물속 얼굴’이라는 작품 속에 선이는 이름 그대로, 창봉(동리의 아명)은 창수로 나타난다.

↑↑ 성건동 강변로에 위치한 김동리선생문학기념비.

어린 소년 동리에게 서천은 이미 이승과 저승 사이를 흐르는 강이었다. 놀이에서 일부러 져주던 한 살 위 소녀, 선이의 죽음은 문학의 세계로 접어들게 한 원형질이라 할 수 있다. 수필 ‘내 문학의 자화상’과 ‘그 사랑’, 청소년동화 ‘우물속의 얼굴’ 등 여러 작품에서 진솔하게 그려지고 있다. 선이의 죽음은 걷잡을 수 없는 고독과 우울 속으로 몰아넣었고, 술을 마시게 했고, 책을 읽게 만들었다.

경주제일교회 부설 계남학교에 다니던 소년은 틈나는대로 서천 징검다리 건너 서산에 가서 놀다오곤 했다. 지금 위치로 보면, 장군교 건너 부엉마을 뒤쪽 일대의 산이다. 넓게는 흥무공원과 금산재를 기준으로 좌우 선도산과 송화산, 옥녀봉 일대였다. 가장 자주 갔던 곳은 글 속에서는 부헝더미, 부헝듬, 송홋골로 묘사되고 있다. 이곳 부헝덤, 부흥더미는 부엉이가 자주 운다 해서 불리어진 마을이름이다. 동리가 그곳을 찾은 이유는 집에서 가깝고, 작은 연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못가에 서 있는 버드나무와 알록달록 깃털을 가진 물새를 볼 때마다 죽은 선이를 떠올리곤 했다. 혼자 산골짝을 헤메다 오거나 가을이면 가랑잎위에 누웠다 돌아오곤 했다고 에세이 ‘내 문학의 자화상’이나 ‘고독을 삼킨 독서’ 등에 잘 드러나 있다. 이처럼 선이가 묻혀있는 서산은 동리문학의 성소같은 곳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서천 또한 문학의 모태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서천의 모랫벌과 갈대밭을 좋아했고 또 늪을 좋아했다. 늪이 들어간 작품들이 꽤 많다. 소설 ‘늪’과 ‘내 속에 있는 늪’이라는 수필과 ‘명상의 늪가에서’라는 수필집이 있고 시도 있다. 여름에 큰물이 지면 물길의 방향에 따라 섬이 되기도 하고 늪이 되기도 했다. 늪은 다른 한편으로 죽음과도 연결된다. 아울러 서천은 그의 작품 속으로 푸르게 흘러가는 강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 성건동 김동리 선생 생가 앞에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금장대 아래서 물살이 소용돌이치며 한바퀴 돌아나가는 그곳이 예기소*이다. 매년 해마다 사람 하나씩 꼭 잡아먹는 이무기가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여름에는 목욕하던 사내가, 겨울에는 썰매타던 아이가 빠져 죽었다는 소문을 애기청소가 있는 금장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필자는 잘 알고 있다. 최근 한 달 전에도 이곳에서 시체가 떠올랐다는 신문기사를 본 적 있다.
유년의 동리에게 서천과 서산이 유별했던 이유는 집안의 뿌리가 서면과 건천쪽에 두고 있어 어른들을 따라 묘사를 다녀오는 즐거움과 선도산 고개쯤에서 서천내를 뒤덮은 환한 갈대 때문에 걸음을 멈춰서야했던 일들이 수필 ‘가을의 정취’에 잘 드러나 있다. 글속에 계린이골, 고란(광명), 한실(대곡리) 등 경주 서쪽 지명들이 심심찮게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모친 허임순 여사도 서악이 고향이다.

에세이집 제목이 되기도 한 ‘꽃과 소녀와 달과’ 수필 속에는 서천으로 걸어나가 남천을 돌아 반월성 근처까지 가면 달이 손에 닿을 듯 가까이 느껴졌고, 집으로 돌아왔을 쯤에는 이슬 묻은 바지가 물에 빠진 듯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유난히 서산 진달래를 좋아했다. 일곱 살 무렵, 마른 다복솔 아래 빨갛게 피어 있는 진달래는 작가를 설레게 했고, 한다발 꺾어들고 돌아오면 골목길이 이제껏 느끼지 못한 환한 햇살이 가득 차있었다고 ‘등불이 켜지듯 퍼지는 햇살’이라는 수필에 멋진 문장으로 그려 놓고 있다. 아마도 선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황홀한 행복감을 잊지 못하여 살고 있는 집 뜰에 진달래를 심었다고 수필 ‘봄을 기다리며’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 김동리 자전적 에세이 ‘꽃과 소녀와 달과’.

자전적 에세이속에서 꺼내고 싶은 이야기들은 참 많다. 남산에 옥삭 주우러 갔던 이야기를 비롯하여 많은 이야기들은 다음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소년 동리가 성건동에서 서천과 서산으로 걸어나갔던 길목에 ‘김동리선생문학기념비’가 몇 해 전 세워졌다. 뜻 깊은 그날 주낙영 경주시장도 참석해 간밤에 읽은 무녀도를 해석하는 장면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생가 복원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왕이면 대표작 무녀도의 배경이 된 애기청소 가까운 곳에 문학비가 하나 세워졌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다. 애기청소, 금장대, 암각화 등과 어울려 경주의 또 다른 명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문학이라는 무형의 자산이 곁들여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무녀도 소설에는 예기소이나 보통 경주사람들은 애기청소라 부르며, 때로는 예기청소(藝岐淸沼), 예기청수(藝岐淸水)로도 표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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