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돌 한글날] ‘최햇빛’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한글사랑 불씨 살리자

최햇빛 선생 활약상, 본지에 고스란히 담겨
왜곡된 한글 바로살리기 운동 재점화 기대

이상욱 기자 / 2022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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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82호(2000년 11월 6일자 1면) 최햇빛 선생의 별세를 알리며, 선생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2022년 10월 9일은 576돌을 맞은 한글날이다. TV나 신문, 길거리의 광고판 등에는 온통 외국어가 장식하고, 인터넷과 SNS에서는 은어와 속어, 그리고 과도한 축약어들이 한글을 뒤틀어놓고 있다.
경주에서 한글 운동가로 왕성한 활동을 했던 고 최햇빛 할아버지.

한글이 왜곡되고 있는 현 시대를 누구보다 우려했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것도 현 시대상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576돌 한글날을 맞아 고 최햇빛 할아버지의 한글사랑을 과거 본지 보도기사를 통해 되새기고, 한글의 우수성, 소중함과 자긍심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본지 482호(2000년 11월 6일자)에는 최햇빛 할아버지가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시 기사에는 그의 한글사랑과 평생을 순수 한글 발굴을 위해 노력했던 일화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 제482호(2000년 11월 6일자 1면) 최햇빛 선생의 별세를 알리며, 선생의 업적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최햇빛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은 2011년 5월 2일자(제988호) 신문에는 김윤근 전 경주문화원 원장이 특별기고를 통해 선생의 업적을 다시금 되새겼다.

당시 ‘고도 경주 아낌회’ 주관으로 김윤근 신라문화동인회장이 쓰고, 미루조각연구소 김진헌 소장이 새긴 기념돌비인 ‘새벽돌비’ 제막식을 앞두고 최 할아버지의 한글사랑 정신을 알리기 위한 기고였다. ‘새벽돌비’ 제막식은 그해 5월 5일 열렸다.

↑↑ 제988호(2011년 5월 2일자 15면) 김윤근 전 경주문화원장이 최햇빛 할아버지 기념돌비를 세우기 전 본지에 보낸 특별기고.

살아 당시 부와 권력으로 주목받던 자들도 떠나고 나면 잊혀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힘도 직위도 갖지 못하고 떠났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더욱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 ---중략---

남천가 양지마을과 마주하는 곳 마을이름이 음침하다 하여 그분의 노력으로 음지마을을 해맞이 마을로 고쳐부른 곳에 사셨던 재야한글 운동가. ---중략---

님은 1910년 7월 5일 경주 인왕동에서 태어나서 2000년 10월 30일 노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높은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았던 무명의 한글운동가였지만 한글사랑으로 민족의 얼을 바르게 심는데 일생을 바치신 고귀한 삶을 살아셨던 거룩한 분이다.

한학을 공부하시다 좀 늦게 계림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했으나 식민교직에 분노를 느끼고 자퇴한 것이 학력의 전부이지만 스스로 공부하고 익힌 한글지식과 열정은 어느 전문학자에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 일어사용을 강요하는 일본인 교사에게 “어떤 말이나 소리도 마음대로 낼 수있는 훌륭한 우리말이 있는데 어째서 그렇지 못한 당신들 말을 써야하는가?”라고 따질 만큼 민족의식도 투철하신 분이셨다.

젊은 시절 ‘한글소설독서회’를 결성하여 마을 청년들을 가르쳤는데 이모임은 일본의 한국문화말살 정책에 맞서는 민족 독립운동으로 간주되어 회원들은 줄줄이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님은 그때부터 도피생활이 시작되었고 황량한 만주벌판을 방랑하면서 민족정기를 일깨우는데 전력을 다하신 분이셨다.

그후 무성영화의 변사로 우리말의 우수성을 실천하시며 우리글의 아름다움을 펼치시고자 노력하셨는데 66년이나 아껴부르던 최칠규란 자신의 이름을 최햇빛으로 고쳐 한글운동이 햇빛처럼 퍼지기를 바라고, 험난한 길의 동반자 부인은 고친 이름처럼 살지는 못하셨지만 남편의 사랑을 받아 포근해 지라고 김난순을 김포근이라 고치고 자식들 이름도 한울, 힘찬울, 은솜, 새솔, 아름, 고은 등 며느리 손자 손녀 이름도 모두 고쳐 불렀다. 나아가 마을이름 고치기와 상용말 고치기를 나라와 단체에 수없이 건의하고 방문하여 많은 성과를 남기셨다.

‘음지’가 ‘해맞이’로 ‘문천’이 ‘반달’로 ‘구역’이 ‘밝은’ 마을로 바뀌고 ‘황용사지’가 ‘황용사터’로 ‘감사하다’가 ‘고맙다’로 ‘귀하’가 ‘님’으로 ‘대축제’가 ‘큰잔치’로 바뀌어 부르게 되었다.

주례 답례는 아이 낳아 한글이름 짓는 것으로 하고 전국 수많은 특강을 통해 한글운동을 펼쳤으며 1980년대 경주 ‘한글물결모임’을 지도하여 길러진 제자들이 교단에서, 언론계에서 크게 활동하고 있다.

님은 초라한 단칸 오두막에서 마을 생필품 구멍가게로 생계를 꾸려 가셨는데 노구에 힘겨운 짐자전거에 배달물건을 가득 싣고 잡아멘 고무줄 사이로는 신문지랑 빈 상자, 빈 병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이는 길 가다 떨어져 있는 폐품들을 주워 끼워가는 것이다.

지금 이땅에 외래문물이 흘러넘쳐 우리가 누구인가를 구분하기도 혼란스러워져 가는 이때 제자들이 뜻을 모아 5월 5일 오후 3시, 님의 혼이 깃든 고운터에 님을 기리는 새벽돌비를 세우려 한다.

돌비에 새길 글은 뭇사람들이 선생님 하시는 일을 보고 최 선생하는 일은 “비단옷 입고 밤길 걷기다 이제 그만하소” 하실 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 사람들아 “밤길도 오래 걷다보면 새벽을 맞이한다”로 정했다.

뜻이 있었으니 생기는 것이 있고 길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최햇빛 할아버지의 높디높은 한글사랑은 선생이 생전 활동했던 모습을 담은 본지 과거 신문에도 자주 실렸다. 최햇빛 할아버지의 초정 강연 소식, 한글학회에서 수여한 한글 고은 이름 부부상 수상, ‘한글운동 한 평생 걸어온 길’ 도서 출판 등등···. 최 할아버지의 활동상황을 신문을 통해 보도해왔었다.

그리고 최햇빛 할아버지는 본지에 독자투고도 자주 해왔는데 그 중 눈에 띄는 글을 소개하면 이렇다. 1996년 2월 5일자(제266호) 신문에 투고한 내용이다.

↑↑ 제266호(1996년 2월 5일자 10면) 최햇빛 할아버지가 본지에 보내 온 독자투고. 독립기념관에 설치된 미아보호소 팻말이 일본식 한문말이라고 지적하며, 이 팻말을 제거하기까지를 담은 일화를 담고 있다.

독립기념관의 미아보호소. 나는 독립기념관을 찾은 적이 있다. 왜정 때 이 나라 열사들이 일본사람들로부터 무서운 고문을 당하는 것을 보고 나라 잃은 설움과 분함을 느끼고 밖을 나와 보니 미아보호소라는 팻말뚝을 보고 참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미아란 일본식 한문말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분들에게 우리말을 ‘잃은 아이’로 고쳐줄 것을 요구했으나 통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서 독립기념관 관장님께 건의서를 보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 뒤에 가보니 대리석에 금박으로 미아보호소라고 새겨 놓은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 다음 경주에 양해룡님이 이끄는 독립기념관 관광단체의 가는 길에 함께 갈 기회가 있었다. 나는 차안에서 미아와 독립기념관의 처사를 설명했다.

차가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양해룡님은 사무실을 찾아가 최햇빛님의 미아에 대한 건의서 처리를 물어보니 그 분야 담당자에게 물어보고 통지를 해주겠다는 말을 듣고 왔다. 그리고 약 20여일이 지난 뒤 독립기념관 신현국 국장님께서 우리 관에서는 미아 따위의 팻말뚝은 없애버렸다는 공문을 받았다. 나는 우리말 글사랑 운동은 한 보람을 느끼고 이 일을 성공하도록 도와주신 양해룡님의 고마움을 가슴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

이 글에서 나타나듯 최햇빛 할아버지는 넉넉하지 않은 농촌생활을 하면서도 우리말과 글에 청춘과 생애를 바쳤다. 우리말과 글을 통해 민족의 혼을 일깨우고 주체성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최 할아버지의 삶은 고독하고 고난의 길이었지만 남겨진 우리들에게 또 후손들에게 민족의 우수한 정신과 자긍심을 키우는 불씨일 것이다. 햇빛 할아버지의 헌신적인 삶을 통해 남긴 순결하고 고귀한 민족애를 배우고, 제576돌 한글날을 계기로 한글사랑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려는 마음가짐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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