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릉 가는 길(下)-서남산…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고 끝난 곳

박혁거세 설화 품은 나정부터, 종말을 고한 포석정까지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11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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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 제1867호 창림사지 삼층석탑. <사진=문화재청 제공>

경주 남산(南山)은 옛 월성 왕궁의 남쪽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다. 산의 이름도 이 같은 지리적 특성에서 비롯됐다.

남산 서편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를 품은 우물 나정과 신라 첫 궁궐터인 창림사지, 후백제 견훤의 공격을 받은 신라가 종말을 고한 포석정이 있다. ‘신라의 역사가 시작되고 끝난 곳’이 이곳 서남산 자락이다.

서남산 쪽 둘레길인 ‘삼릉 가는 길’은 신라의 왕궁이 있던 월성에서 시작한다. 월성 서쪽 끄트머리 서문 터를 빠져나와 월정교를 건너면 도당산을 마주하게 된다. 도당산은 남산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의 끄트머리에 나지막히 솟은 산이다. 1976년 경주 IC와 도심을 잇는 서라벌대로가 개설되면서 한때 남산과 단절되기도 했으나, 2016년 경주시가 끊어진 구간에 길이 80m, 폭 30m 규모의 생태터널(도당산터널)을 만들면서 옛 모습을 되찾았다.

계단 길을 따라 도당산 전망대에 이르면 화백정이란 이름의 정자를 만난다. 경주시가 도당산터널을 만들면서 옛 신라 왕과 왕비가 남산으로 가던 도중 휴식을 한 곳이라는 전설을 담아 정자를 세웠다. 화백정과 도당산터널을 차례로 지나 산을 내려서면 너른 들판이 펼쳐진다. 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면 남간마을이다.

월정교를 건너 도당산으로 오르지 않고 천관사지와 오릉을 거쳐 남간마을로 갈 수도 있다. 도당산 앞 이정표가 안내하는 ‘삼릉 가는 길’ 방향을 따르면 된다.

월정교 남단에서 700m 정도 떨어져 있는 천관사지는 김유신과 천관녀에 얽힌 창건설화로 널리 알려진 절터다.
 
흥미로운 사실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는 정작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회자되던 이야기를 설화 형식으로 엮어낸 사람은 고려 중기의 문인 이인로(1152~1220년)였다.

하지만 ‘삼국사기’에 ‘천관신’(天官神)이 언급되고 ‘삼국유사’에도 ‘천관사’가 등장하는데다, 오늘날까지 천관사지가 전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신라 때 천관사가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보인다. 따라서 설화처럼 천관녀가 살던 집터에 ‘천관사’란 절이 세워진 것도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김유신의 집터로 알려진 재매정과 천관사지까지는 거리가 500m 정도란 점에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 또한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

↑↑ 경주 남산 남간사지 당간지주.

-큰 인물 키운 땅…남간마을과 나정
남간마을엔 남간사지 석정(돌우물)이 있다. 조금 떨어진 곳엔 보물 제909호인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고, 그 뒤로는 남산이 배경처럼 솟아 있다.
 
이 근처 어딘가 있었을 남간사는 신라의 승려 혜통의 집이 있었던 터에 창건한 사찰로 전해지는데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남간사 외에도 이 마을은 불교사적으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남간마을 일대엔 남간사를 포함해 예닐곱 곳 정도의 절이 모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남간마을은 전체가 절터다. 그래서인지 집집마다 절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덮개돌이나 석재 등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신라 불교의 기틀을 다진 자장율사(590~658년)의 집안도 이곳 남간마을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선덕여왕에게 황룡사 9층목탑을 세우도록 건의했고, 울산의 태화강 입구에 태화사라는 절을 세워 신라의 해운물류와 국방의 거점으로 삼았으며, 양산 영축산 밑에 통도사를 건립해 국가적으로 승려를 양성하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문무왕 재위 시절, 용궁에서 배워왔다는 주술적인 밀교(密敎) 의식인 ‘문두루비법’으로 서해를 건너던 당나라 설방의 50만 대군의 배를 모두 침몰시켰다고 전해지는 명랑법사도 이곳과 관련이 있다.

명랑은 앞서 언급한 자장율사의 조카다. 다시 말해 명랑의 어머니 남간부인(법승랑으로도 불린다)의 남동생이 자장율사다. 명랑의 두 형 또한 ‘대덕’ 칭호를 받은 덕망 높은 승려였다.

‘삼국유사’엔 명랑법사와 관련한 흥미로운 또 다른 일화도 있다. 명랑이 당나라에 유학한 뒤 돌아오는 길에 바다 용의 청으로 용궁에 들어가 비법을 전하고 황금 1천냥을 시주받은 뒤 땅 속으로 몰래 들어가 자기 집 우물 밑으로 솟아나왔다. 이후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짓고 용왕이 시주한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꾸몄다. 유난히 광채가 빛나 절 이름을 금광사라고 했다는 게 대략적인 내용이다.

남간사지 석정이 명랑법사가 솟아나온 우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부 학자들은 이 동네가 남간부인과 연관돼 ‘남간’이란 마을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보고, 몇 가지 석조유물이 나온 인근 한 연못(금강못, 또는 금강저수지) 부근이 명랑법사의 출생지이자 금광사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600m 정도 떨어진 곳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신화가 깃든 신라의 상징적 유적지 ‘나정’이 있다.
남간사지 당간지주가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엔 창림사지가 있다. 신라의 첫 궁궐 자리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보물 제1867호인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이 절의 상징적인 건축물이다. 신라 탑의 주요 명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특히 탑에 돋을새김한 팔부신중(불법을 수호하는 여덟 수호신) 조각이 유명하다.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제16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국보 제35호) 등과 더불어 가장 뛰어난 국내 석탑 팔부신중 조각으로 인정받는다. 오랫동안 파괴된 상태로 방치됐다가 1976년 사라진 부재를 일부 보강해 복원됐다.

↑↑ 삼릉.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이다. <사진=경주시 제공>

-길에서 만나는 신라 말 비운의 왕들
창림사지에서 남쪽으로 600m쯤 가면 포석정을 만난다. 신라의 의례 및 연회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다. 신라 제55대 경애왕의 마지막 이야기가 이곳에 남아있다. 927년 후백제가 경주로 쳐들어왔을 때에 경애왕이 이곳에서 잔치를 베풀다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진다. 신라의 시작과 끝이 ‘삼릉 가는 길’ 위에 모두 있는 셈이다.

인근엔 보물 제63호인 배동석조여래삼존입상이 있다. 신라시대 가장 오래된 불상가운데 하나라고 하는데 세 부처는 얼마나 복스럽게 생겼는지 보는 사람의 입을 자연스레 미소 짓게 만든다. 가까이에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달을 바라보는 절’이란 이름이 인상적이다. 절 안에 세워진 작은 육각형 대명전 건물 안에 선덕여왕 위패를 모신 점이 특이하다.

망월사를 지나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곡한 숲에 접어들면 왕릉 3기가 모여 있는 삼릉을 만나게 된다.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제53대 신덕왕, 제54대 경명왕의 무덤이다. 인근엔 경애왕의 무덤이 있다.

아달라왕을 제외하고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은 모두 신라가 기울어가던 시절의 통치자들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신덕왕 통치 시절엔 천재지변이 특히 많았다고 한다. 봄이 한창인 4월에 서리가 내리고 지진이 일어났으며, 잦은 해일과 떼로 몰려든 까치와 까마귀 탓에 백성들이 힘들어했다고 전한다.

신덕왕의 아들인 경명왕은 기울대로 기운 나라를 어렵사리 떠받치고 있던 왕이었다. 과거의 영화는 이미 사라지고 외세의 침입 앞에 망해가던 나라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허울뿐인 군주였다.

신덕왕의 아들이자 경명왕의 동생이던 경애왕 또한 아버지와 형처럼 불행한 삶을 살았다. 왕건에게 굴종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면서까지 나라를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 후백제의 실력자 견훤에 의해 죽음을 맞았고, 함께 있던 왕비와 후궁들은 후백제군에게 능욕까지 당했다고 전해진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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