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편지와 아버지 대서에서 온 대필유전

사람의 마음을 움켜잡는 것은
도도한 지식과 화려한 문장이 아닌 진심을 파고드는 솔직함이다

박근영 기자 / 2022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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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힘든 휴전선에서 오늘도 나라를 지키고 있을 OO이 보아라. OO아. 며칠 전에 보낸 니 편지 잘 받았다. 집에는 너거 아버지를 비롯해 모든 식구들이 별 탈 없이 잘 지낸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이 문장은 내 어머니가 동네 ‘아지매’ 중 한 분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의 초반부다.

어머니는 올해 88세 되시는 고령이다. 그러나 당시 여성으로는 드물게 중학교까지 나오신 고학력(?) 출신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가정실태 조사를 한답시고 집안의 재산상태, 부모님의 학력, 직업 같은 것을 내놓고 조사하곤 했는데 70명 가까운 반에서 그때 어머니가 대학교 나온 친구들은 거의 없었고 고등학교 나온 사람이 한둘, 중학교 나온 사람이 네댓쯤이 고작이었다. 초등학교 나온 사람도 열 손가락 미만이었다. 이를테면 어머니는 그 시대 신식 교육을 받은 흔치 않은 여성이었던 셈이다. 요즘 석사 학위 가진 여성의 비율보다 어머니 시대 중학교 나온 여성이 훨씬 귀했을 것이다.

어릴 때 내가 자란 경주 교촌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큰 기와집 대부분은 경주최부자댁 후손들이 살던 곳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오랫동안 최부자댁과 관련되어 일하던 집안의 후손들이거나 새로 이사와 살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최부자댁 사람들은 자신들끼리는 자주 섞였는지 몰라도 동네의 이런저런 행사와는 거의 무관하게 지냈다. 최부자댁 여성들 중에는 고학력자들이 많았는데 동네 아지매들과 거의 내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부녀 회장하시던 채모 할머니가 최부자댁 후손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동네 부녀회 일을 보지만 거의 상징적인 역할이었다. 그럴 때, 어머니가 부회장을 맡아 오래 활동하시면서 실질적으로 회장 노릇을 했기에 동네 아지매들은 무슨 일만 생기면 집으로 달려와 어머니와 상의하곤 했다. 어머니는 이를테면 교촌 아지매들의 온갖 해결사 노릇을 다 하신 셈이다.

동네 아지매 대부분이 글자조차 모르는 무학(無學)들이다 보니 가장 긴요한 것이 읽고 쓰는 문제였다. 그중에서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놓거나 먼 공장에 딸을 보낸 아지매들은 대문이 닳도록 우리집을 드나들었다. 편지를 읽어 달라거나 써달라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이고 근여이 어무이요. 이거 쫌 읽어 주소. 우리 OO이가 펜지를 또 보냈데이...!”

내 이름을 넣어 ‘근여이 어무이’로 통하던 어머니는 이럴 때면 열일을 제쳐 두고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하고 가급적 즉석에서 답장을 써주시곤 했다. 이렇다 보니 어머니는 동네 자녀들 중 어느 집 아들은 어디서 복무하고 있고 어느 집 딸은 또 어떤 곳에서 일하고 있는지 깨알처럼 알고 계셨다.
 
당연히 해당 집안의 대소사도 꿰고 계셨다. 어머니가 답장을 쓸 때는 가급적 집안 근황을 꼬치꼬치 묻고나서 쓰셨다. 그래야 멀리 가 있는 아들딸들이 집안 소식을 두루 알고 안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누구네 집 딸은 어디에 취직되어 갔고 누구네 집 맏이는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누구네 집 암소가 숫송아지를 낳았지 암송아지를 낳았는지 손바닥 보듯 알고 계셨던 것이다.

80년대 이전만 해도 전화가 흔치 않을 때이고 군대나 공장과의 소통은 편지가 유일했다. 그만큼 자식들 편지는 반갑고 귀했다. 어머니가 편지를 읽을라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연신 눈물을 닦거나 코를 훌쩍였다.
 
어머니가 ‘부모님 전상서’라는 첫 글을 읽을라치면 앞에 앉은 아주머니는 눈물부터 찔끔 흘리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었고 편지를 다 읽고 마칠 즈음에는 어느새 눈물 콧물이 범벅된 아주머니들 얼굴을 보곤 했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편지 읽는 소리는 더욱 낭랑하고 한 줄 한 줄 읽을수록 감정이 충만해졌다. 또 다 쓴 답장을 아지매들에게 읽어줄 때면 ‘우예 그래 내 마음을 잘 알아서 씨는기요?’라는 인사를 으레 듣곤 했다.

어머니의 편지 쓰기는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내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직접 경험해본 것은 내가 대학에 가서였다. 학보사 기자 시절 대학 친구 하나가 연애편지를 대신 써달라 한 적 있었다. 소개팅에서 만난 여대생에게 좀 더 가깝게 다가가고 싶었던 그 친구는 자기를 좀 유식하게 포장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마침 그 무렵 니체의 무슨 책을 ‘폼 삼아’ 읽고 있었는데 되먹지 않게 그 편지에 니체와 관련된 내용을 넣어서 써주었다.
 
솔직히 그때 읽던 니체는 어렵기가 이만저만 아니어서 책을 반 가깝게 붙들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무슨 소린지 가늠하지도 못한 채였다. 그런 상태에서 터무니없는 자만심으로 쓴 연애편지가 온전하게 보였을리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편지가 가고 나서 그 여학생으로부터 답장이 없었다는 친구의 푸념을 들었을 때 그게 내가 쓴 편지 탓이 아니고 친구가 여학생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애써 주장했지만 속으로 뜨끔한 것을 지울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유치하기 이를 데 없고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따지자면 어머니가 대신 쓴 편지는 철저히 부탁한 아지매의 마음과 아지매 집의 진실한 소식이 담겼을 뿐이지만 내가 대신 쓴 편지에는 오만과 허세가 잔뜩 들어있었던 셈이다. 똑똑한 여대생이었다면 그런 편지를 받고도 좋아서 해실거릴 리 없을 것이다.

대필이라고 하면 아버지 역시 만만치 않은 이력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는 흔히 말하는 면서기 출신이시다. 고향인 내남면에서 수년간 면서기로 근무하셨고 뒤에는 그런 이력을 바탕으로 행정서사 업무, 대서방을 열고 오래 일하시기도 했다. 대서는 서류를 대신 써주는 일인데 그 역시 워낙 글자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라 생긴 직업일 것이다.

내가 대학 진학 후 군 문제를 해결하고 일 년 남짓, 아버지 사무실에서 잡무를 도와드린 일이 있었다. 그때 가끔씩 아버지를 찾아와 고소장을 쓰달라거나 청원서를 써달라는 분들이 있었다. 원래 그런 일들은 사법서사(법무사)들의 고유업무인데 아버지 지인들은 그런 것을 따지지 않고 무턱대고 아버지를 찾아와 이런 일을 부탁했던 것이다.

이럴 때 아버지는 업무영역을 굳이 따지지 않고 가급적 그 부탁을 들어주곤 하셨다. 어차피 고소장이나 청원서가 특정 양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리에 맞게 정리를 잘해 주면 되는 일이었고 사법서사 사무소에 가도 특별히 잘 써줄 것이란 보장도 없으니 지인들의 부탁을 들어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고 나면 아버지 지인들은 점심을 사기도 하고 막걸리를 내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나에게 한 번 보고 고칠 곳이 있는지를 보라고 하셨다. 아무래도 대학 다니면서 학보사 기자까지 지냈으니 아들이 한 번 봐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셨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쓰신 고소장이나 청원서는 적어도 내용을 쉽게 파악하거나 사실을 적시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조리 있고 문장 구성도 잘 되어 있었다. 특히 군더더기 없이 필요한 내용만 쏙쏙 뽑아 써놓으시는 것은 그때 나로서는 흉내 내기 어려운 실력이었다. 아버지는 오랜 기간 일기를 쓰셨는데 아마도 아버지의 대서 실력은 일기 쓰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 번은 아버지 대신 내가 고소장을 써본 적도 있는데 우선 부탁하신 분의 장황한 이야기를 끊는 것이 힘들었고 그 많은 푸념 중에서 핵심적으로 무얼 골라야 할지 선택하기 어려웠다.

푸념하는 내용이 하나같이 다 억울하고 중요해 보였는데 그게 사회생활을 해보지 않은 학생의 한계였다고 지금 생각된다.

돌이켜 보면 내가 대필작가가 된 이면에는 어렸을 때부터 봐오던 어머니의 편지 써주기와 아버지의 대서 유전자가 나도 모르게 깃든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 대필은 어머니의 편지 쓰기와 아버지의 대서 업무와 하등 다를 게 없다. 꼼꼼히 내용을 듣고 핵심을 잡아 쓰는 것은 똑같기 때문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 사람의 마음을 움켜잡는 것은 도도한 지식과 화려한 문장이 아닌 진심을 파고드는 솔직함이란 것이다. 그게 어머니의 편지 쓰기와 아버지 대서업무의 가장 큰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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