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上)-신라 최대 호국사찰 흔적 곳곳에

‘장육존상’ ‘9층탑’, 553~645년, 100여년에 걸친 대역사

경주신문 기자 / 2022년 12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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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황룡사지 목탑터 유구. <사진제공: 문화재청>

층층이 사다리 휘감아
하늘로 오르려하여
層梯繚繞欲飛空

주변의 온갖 산수들 한눈에 들어오네
萬水千山一望通

몸은 노오(옛 신화 속 도인)가
오르내리던 너머로 벗어나
身出盧敖登降外

눈길은 수해(신화 속 잘 달리는 사람)가
오가던 속을 압도하네
眼呑竪亥去來中

은하수 뗏목 그림자 떨어져
처마 앞 비이고
星槎影落簷前雨

달의 월계수 향기 날려
헌함 아래 바람이네
月桂香飄檻下風

동도를 굽어보니 수많은 집들
俯視東都何限戶

벌집이나 개미구멍인양
더욱 아득하네
蜂窠蟻穴轉溟濛

조선 초 학자이자 문신인 김극기(1379~1463)가 쓴 ‘황룡사黃龍寺’란 시다. 황룡사는 신라 궁성인 월성 동북쪽에 있었던 절로, 신라 최대의 호국(護國) 사찰이었다.


불국사 8배의 거대 사찰

‘삼국사기’는 황룡사 창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14년(553)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이라고 하였다”
진흥왕 14년 새로운 궁궐을 지을 때 용이 한 마리 나타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왕이 사찰로 고쳐 짓고 이름을 황룡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황룡사는 신라의 대표적 사찰이었던 만큼 그 면적이 불국사의 8배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고 한다. 같은 왕 30년(569)에 담장을 쌓아 17년 만에 완성하였으며, 35년(574)에는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조성했다. 진평왕 6년(584)에는 금당(金堂)을 조성했고, 선덕여왕 14년(645)엔 대국통(大國統) 자장(慈藏)의 건의로 9층탑을 건립했다.

553년부터 645년까지 거의 100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를 통해 국찰(國刹)의 면모를 갖췄다.
그런 만큼 이곳엔 엄청난 물건으로 가득했다. 장육존상과 9층탑은 진평왕 때 천사가 궁중에 내려와 왕에게 줬다는 ‘천사옥대’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세 가지 보물을 의미하는 ‘신라삼보’(新羅三寶)로 불렸다. 장육존상은 5m 크기의 금동불상으로 추정되며 9층탑은 높이가 80m에 달하는 거대한 탑이었다.

게다가 이곳에 있었던 대종은 성덕대왕신종의 4배에 달하는 구리가 사용된 거대한 종이었다고 한다. 모든 면에서 신라를 대표하는 최고 보물이 존재한 장소였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의 미(美)’를 대표하는 유적인 석굴암이나 석가탑, 다보탑 등은 보물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솔거의 금당벽화도 이곳에 있었다. 새들이 진짜 나무인 줄 알고 벽에 부딪혔다는 일화가 이곳의 이야기이다. 황룡사 강당에선 당대 최고 승려였던 원효가 설법을 했다. 그밖에도 원광, 안함, 자장 같은 고승들이 머물며 주요 경전을 강의했고, 역대 왕들은 백좌강회(百高座會), 팔관회(八關會), 연등회(燃燈會) 등에 참석하는 등 나라에 큰 일이 있거나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 경주 황룡사지 내 삼존불상 지대석. <사진제공: 문화재청>


왕권에 신성함 더한 강력한 상징


이 절을 처음 짓도록 명한 진흥왕은 신라 왕실을 석가모니 일족의 재림이라 생각했던 인물이었다. 물론 국왕 자신을 불교 속 전륜성왕과 동일시하여 불법을 지키는 수호자이자 정복자로서 알리는 것은 당대 중국에서도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진흥왕은 여기서 더 나아가 금륜, 은륜, 동륜, 철륜으로 나뉜다는 전륜성왕 등급에 맞춰 자식의 이름을 동륜과 사륜으로 지었다. 심지어 태자 동륜의 아들 이름은 백정(白淨), 며느리는 마야(摩耶)라고 하여 실제 석가모니의 부모 이름과 동일하게 지을 정도였다. 손자가 부처의 부모이니 그 뒤에는 부처가 태어날 차례라는 의미였다.

뜻한 대로 손자 백정이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진평왕이다. 하지만 진평왕에겐 아들이 없었다. 결국 그의 딸인 선덕여왕이 여자의 몸으로는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다. 이로써 진흥왕 때부터 4대에 걸친 왕실의 쇼는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한 실패로 마무리된 것이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은 부처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겐 여성이 불법을 열심히 지키면 도리천의 왕인 제석천의 아들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결국 여성 몸을 지닌 당시 생애를, 미래의 부처가 되기 위한 준비 단계로서 인식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거대했던 황룡사는 그 거대함만큼이나 남달랐던 정신세계가 몇 대에 걸쳐 투입돼 만들어진 사찰이었다. 다시 말해 이전의 5~6세기 초반 마립간시대 왕들이 경주 중앙에 거대한 고분을 만들어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면, 6~7세기 신라왕들은 평지에 거대 사찰을 만들어서 왕가의 힘을 과시했다. 결국 진흥왕부터 선덕여왕까지 신라를 대표하는 성골 집안의 불교 수호를 위한 자부심이 만들어낸 사찰이었으니 모든 면에서 크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성골 왕들은 이렇게 만들어진 황룡사가 자신들의 불법 수호 의식을 영원히 알리며 지켜지길 바랐다.

경덕왕 13년(754)에 대종(大鐘)이 주조되고, 종루(鍾樓)와 경루(經樓, 불경을 보관하던 누각)가 목탑 좌우에 배치되면서 가람의 일부가 바뀌었지만,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시대까지도 중요한 사찰로 인식되어 국가 주도의 대대적인 수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1238)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버린 뒤 수리되지 못하고 오랫동안 방치됐다. 해방 후에는 절터 내에 민가와 논밭 등이 들어서서 상당 부분이 파괴된 상태였다고 한다. 지금은 건물과 탑, 불상이 있었던 자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주춧돌만 남아 있다.

황룡사 터에 대한 발굴은 197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8년간 8차례의 발굴조사를 통해 회랑(回廊, 건물 주위를 둘러싼 지붕)이 있는 긴 복도 안쪽 편에서 금당(金堂, 부처님을 모신 건물 터), 목탑 터, 강당 터 등 14곳 이상의 건물 터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회랑 외곽과 담장 사이에서는 강당 북서편 부속건물 터 16곳, 강당 북편 부속건물 터 10곳, 강당 북동편 부속건물 터 5곳, 중문과 남문 사이 건물 터 4곳, 남문 터 1곳 동회랑 동편 건물 터 5곳, 절 편 건물 터 2곳 등 43곳 이상의 크고 작은 건물 터가 나왔다. 조사를 통해 절의 영역은 약 8만928㎡에 달하며, 4만여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를 통해 황룡사는 불타 없어질 때까지 그 구조가 세 번 바뀌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황룡사 발굴조사는 고대 사찰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용궁龍宮에 사찰 부지를 마련했다는 기록이 황룡사 터 일대가 저습지였다는 고고학 조사 결과와 일치한다는 점을 밝힌 것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러한 점에서 황룡사 터는 신라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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