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지(下)-황룡사구층목탑… 30층 아파트 높이 맞먹는 신라 3대 보물

몽골 침입 불타, 실물 1/10 구현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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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사역사문화관 1층에 있는 황룡사구층목탑 1/10 모형. 8m 크기의 재현품이지만 그 위용이 상당하다.

한 층을 보고나서 또 한 층을 보니
(一層看了一層看)

걸음걸음 높이 올라 눈길이 점점 넓어지네
(步步登高望漸寬)

지면은 깎은 듯이 널찍이 평평하여
(地面坦然平似削)

지친 백성들 무너진 집도 평탄하니 볼 만하네
(殘民破戶平堪觀)

고려 후기의 승려 혜심(慧諶, 1178~1234)이 쓴 ‘황룡사 탑을 오르다’(登黃龍塔)란 시다. 혜심은 전남 나주 출신으로, 지눌(知訥)의 뒤를 이어 수선사(修禪社)의 제2세 사주가 돼 간화선(看話禪)을 강조하면서 수선사의 교세를 확장한 인물로 전해진다. 그의 시문을 모은 ‘무의자시집’은 시인으로서의 감수성과 함께 수행에 정진하는 수도자로서의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 시 또한 ‘무의자시집’에 실려 있다.


신라 호국 염원 담은 가장 높은 목조 건축물

혜심의 시에 등장하듯, 신라시대 최대 사찰이었던 황룡사엔 선덕여왕때 건립한 9층 목탑이 있었다. 황룡사 터에 지금은 주춧돌만 썰렁하게 남았지만, 이 탑은 높이가 80m에 달했을 정도로 신라에서 가장 높은 목조 건축물이었다. 30층 아파트에 맞먹는 높이다.

황룡사구층목탑은 황룡사장륙존상·천사옥대와 함께 신라의 세 가지 보물 ‘신라삼보’(新羅三寶)로도 불렸다. 기록에 따르면 이 탑은 신라의 승려 자장의 건의로 선덕여왕이 645년 세운 것이다. 백제의 장인 아비지를 초청하고 김용춘이 신라 장인 200명을 인솔하여 완공했는데, 자장이 중국에서 받은 사리 100알을 나누어 그 일부를 황룡사의 기둥 안에 안치했다고 한다.

효소왕 7년(698년)과 성덕왕 19년(720년), 경문왕 11년(871년)에 수리를 했고, 고려조에도 여러 차례 중수했다. 이후 1238년(고종 25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와 함께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해동(海東)의 이름난 현인으로 불렸던 안홍(安弘)의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인용해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신라 제27대에는 여왕이 임금이 되었는데 비록 도리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노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9층의 탑을 세우면 이웃나라로부터 말미암은 재앙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니 제1층은 일본(日本)이요, 제2층은 중화(中華)요, 제3층은 오월(吳越)이요, 제4층은 탁라(托羅, 탐라)요, 제5층은 응유(鷹遊, 백제)요, 제6층은 말갈(靺鞨)이요, 제7층은 단국(丹國, 거란)이요, 제8층은 여적(女狄, 여진)이요, 제9층은 예맥(穢貊, 고구려)다”라는 내용이다. 이처럼 황룡사구층목탑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호국의 염원이 반영돼 있었다.


보물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나와

탑은 가로 세로 45m의 정방형 기단 위에 조성됐는데, 몸체 부분이 약 65m, 상륜부의 높이 약 15m, 전체 약 80m의 9층 목탑으로 추정된다.
 
고려 때 승려 혜심의 시에 “한 층을 보고나서 또 한 층을 보니 걸음걸음 높이 올라 눈길이 점점 넓어지네”라고 묘사한 부분, 고려 중기 문인 김극기가 ‘황룡사’란 시에서 ‘층계로 된 사다리 빙빙 둘러 허공에 나는 듯, 일만 강과 일천 산이 한눈에 트이네’라고 노래한 점 등으로 미뤄 탑은 9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고려 고종 25년(1238년) 겨울 몽골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다. 지금은 탑의 기단과 주춧돌 등만 남아 있다.

구층탑 터에 대한 조사는 1976년부터 1983년까지 경주고적발굴조사단(지금의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이뤄졌다.

조사 결과 목탑은 정면 7칸, 측면 7칸의 정방형이며, 기단은 동서 28.8m, 남북 28.9m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단층기단 둘레에 이중으로 지대석(터에 쌓은 돌)을 돌리고 그 사이에 벽돌을 깔았다. 기단 남측 3곳과 북·동·서쪽 각 1곳에선 계단 터도 확인됐다. 탑 중심에 위치한 심초석(목탑의 중심 기둥을 받치는 돌) 하부조사에서는 백자로 만든 작은 항아리와 청동 거울, 귀걸이 장식, 팔찌, 구슬 등 다양한 금속유물과 보석이 수습됐다.

이와 함께 사리장엄구(사리함과 사리병을 비롯한 사리를 봉안하는 일체의 장치)도 발견되었다. 사리장엄구의 내·외함엔 경문왕 12년과 13년(872~873년) 황룡사 탑을 수리한 경위가 기록돼 있어 큰 주목을 받았다.

훗날 보물 제1870호로 지정된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는 사리내함 판에 쌍구체(雙鉤體)로 음각으로 새겨졌는데, 3매의 판에서 모두 74행 905개의 글자가 판독됐다. 자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9층 목탑을 창건한 경위, 문성왕에서 경문왕대에 이르는 중수 사실 등이 확인됐다.


↑↑ 황룡사역사문화관에 있는 장육존상 모형.

황룡사역사문화관서 구층목탑 흥망성쇠 만난다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 터 인근 1만4000여㎡ 부지엔 연면적 2865㎡ 2층 규모로 지어진 황룡사역사문화관이 있다. 황룡사구층목탑은 사라졌지만 당시 웅장했던 탑의 위용과 선조들의 지혜를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다.

황룡사역사문화관엔 실물의 10분의 1 크기로 만들어진 황룡사구층목탑이 있다. 높이 8m 규모의 재현품이지만 그 위용이 상당하다.

탑 사면 중 북쪽은 각층의 탑 난간과 지붕에 기와를 얹지 않아 관람객들이 목탑의 내부구조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4만2000개의 나무 부재와 8만5000장의 동기와가 사용됐고, 막새 문양은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기와문양을 새겨 넣었다. 탑의 단면 모형 제작, 구조안정성 검토, 3D 설계단계 등을 거쳐 9층 목탑의 모형을 완성하는데 8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황룡사역사문화관은 크게 구층목탑, 황룡사, 장육존상 등 3가지 테마로 구성돼 있다.

‘3D 영상관’에선 황룡사의 역사를 담은 입체 영상물을 상영한다. 신라시대 궁궐을 지으려다 황룡이 나타나 사찰로 변경된 황룡사의 태생에서부터 자장 율사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와 9층 목탑에 모시는 장면, 몽골 침입 때 사찰이 사라지는 장면 등 황룡사와 구층목탑의 흥망성쇠를 만나볼 수 있다.
이곳에 전시된 장육존상 불두 모형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이 모형은 1982년 황룡사 터에서 출토된 청동 나발(불상의 머리카락) 조각을 통해 신라 최대 금동불상이던 장육존상의 크기를 가늠해보고자 진품을 복제해 연구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실제 청동나발은 6세기 후반에 제작됐다고 한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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