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식의 경주인문학산책] 작지만 큰 절, 분황사의 인문학

원효의 향기 남은 분황사, 계승·발전으로 국제적 명소되길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1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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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전경(겨울) <사진: 분황사>

눈에 보이는 분황사는 작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분황사는 큰 절이다.
분황사가 가지고 있는 인문학적 콘텐츠의 질적, 양적 크기로 보면 우리나라 단일 사찰 중 으뜸이 아닐까? 어떤 사람들은 분황사를 방문하여 국보 30호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절을 한 바퀴 둘러보는데 10분이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분황사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다 들으려면 석 달 열흘도 모자랄 것이다. 원효와 관련된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분황사는 향기로운 황제의 절이라는 뜻으로 선덕여왕 3년(634년)에 건립되었다. 당시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탑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모전석탑으로 가장 오래된 신라의 탑이다. 신라 불교 전성기의 기틀을 마련한 자장율사와 우리에게 익숙한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곳이다.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전경(가을). <사진: 분황사>

특히, 우리나라 최고의 철학가이며 사상가이자 최고의 저술가 원효가 주석하면서 「화엄경소」 외 수십 권의 저서를 집필하던 곳이다.
 
그의 철학과 사상은 중국과 일본으로 퍼져나갔으며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중국과 일본 등 외국에서 더 인정받았다. 그를 ‘해동보살’로 칭하며 보살의 반열에 올려놓기도 했다. 이곳에서 한창 저술 활동을 펼치다가 붓을 내던지고 저잣거리로 뛰쳐나갔다. 머리 기른 소성 거사가 되어 무애춤을 추며 ‘나에게 도끼자루를 달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니는 시대의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혈사에서 원효가 입적하자 아들 설총은 원효 유해를 부수어 만든 소상을 분황사에 모셨는데 설총의 예배에 고개를 뒤로 돌린 소상은 고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쓸 무렵까지 존재했다고 하나 지금은 소재를 알 수가 없다.
 
고려 때 대각국사 의천이 분황사에서 원효 조각상을 보고 “이제 계림의 옛 절에서/ 마치 살아 있는 원효를 뵙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今者鷄林古寺 幸膽如在之容)”는 시, 「제분황사효성문(祭芬皇寺曉聖文)」에서 엿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쓸데없이’ 또는 ‘쓸데없다’ 말은 설총의 빗자루질과 관련된 원효와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는바, 일화의 탄생 배경이 된 곳이 분황사 절 마당이다.

↑↑ 경주 분황사지 내 당간지주. <사진: 분황사>

광덕과 염장 두 사람을 성불로 이끈 광덕의 처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광덕과 살았어도 잠자리를 하지 않은 광덕의 처는 분황사 여종으로 관음보살의 19 응신의 한 분이었다는 이야기의 배경에 분황사가 있고 원효가 등장하기도 한다.

신라의 화가 솔거가 그렸다는 분황사 천수대비 관음보살상 벽화는 신비로운 영험을 가져다주어 신의 화가로 불린 이야기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희명의 아이가 태어난 지 다섯 달 만에 눈이 멀자 분황사 천수대비 앞에서 눈먼 자식 눈을 뜨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였더니 결국 눈을 떴다는 희명의 노래 「도천수대비가」가 향가로 전해지고 있다.

경덕왕 때 구리 30 만근으로 세운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지금 전하는 것은 조선 후기에 규모를 많이 축소하여 세운 것이다. 이 시기에 세워진 유일한 금동입상으로 최근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분황사에는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 또는 ‘호국용변어정(護國龍變漁井)’으로 부르는 우물이 있는데 세 마리 호국용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때 당나라 사신이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몰래 가져가려던 것을 경산 하양까지 쫓아가서 빼앗은 후 도로 우물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우물은 불교의 핵심 기본 교리인 팔정도를 상징하는 팔각형의 형태로 신라 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우물이다.

고려 숙종 때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명종 때는 화쟁국사비(和靜國師碑)를 경내에 세웠지만 비는 멸실이 되고 현재 비각 받침대만 남아있다.

↑↑ 경주 분황사 화쟁국사비. <사진: 분황사>

금오산 용장사에 거처를 정한 매월당 김시습은 폐허의 고도 경주 유적지들을 돌아보며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분황사에 와서 원효를 노래한 「무쟁비(無諍碑)」와 잡초가 자라는 쓸쓸함을 노래한 「분황사 석탑」 두 편의 시를 『유금오록』에 남겼다.

추사 김정희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낸 기쁨으로 이듬해인 1817년 경주에 왔다. 암곡 동 무장사지에서 비문과 배반동 들판에서 문무왕 비석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리고는 분황사에서 화쟁국사 비부를 찾아내어 빗돌 받침대에 ‘此和靜國師之碑趺(차화정국사지비부)’라는 글씨를 새겨 넣기도 했다.
즉문즉설로 유명한 법륜 스님도 경주고 재학시절 인근 분황사를 수시로 찾았고, 은사인 도문스님과의 선문답에서 크게 충격을 받고 출가를 결심한 곳이기도 하다.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스님은 그 옛날 원효의 향기 가득한 분황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몽고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소실되고 지금 같은 작은 규모로 다시 지어졌다. 그런가 하면 경내 외곽 우물에는 훼손된 불상들이 여럿 발견된 숭유억불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아픔이 많은 곳이다. 최근 발굴결과 3만 평 가까운 대가람으로 밝혀졌지만,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과 동시에 복원도 현실적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다행히 매년 봄에는 원효제향대제(음력 3월 29일)와 가을에는 원효예술제(10월 2째주) 등 원효 성사를 기리는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족한 느낌이다. 분황사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콘텐츠 활용을 통한 계승과 발전으로 국제적 명소가 되었으면 한다.

당간지주가 있는 분황사 앞마당은 계절마다 피어나는 꽃을 보러 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봄에는 청보리, 가을에는 코스모스 등 넓은 들판에 꽃 장엄을 이루고 있다. 천년 세월 건너 전해지는 신묘한 이야기들이 오늘날 절 앞마당에 온갖 꽃으로 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원효와 설총, 엄장과 광덕의 성불이야기, 눈을 뜬 희명의 간절한 노래, 영험한 솔거의 그림, 그리고 추사와 매월당 같은 이 땅의 천재들이 분황사를 다녀간 이유와 숨은 이야기들을 가슴에 가득 담고 볼 수 있다면 좋겠다. 분황사는 결코 작은 절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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