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사지-텅 빈 절터에 남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

기록에는 없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이야기

경주신문 기자 / 2023년 0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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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관사 터 전경. 경주시는 최근 천관사 터를 깔끔하게 정비하고 흩어져 있던 탑 부재를 활용해 삼층석탑을 추정 복원했다.

천관이란 절 이름은 유래가 있는데
(寺號天官昔有緣)

새로 짓는다 문득 듣고 매우 처연하네
(忽聞經始一悽然)

정이 넘치는 화랑은 꽃 아래 노닐고
(多情公子遊花下)

원망 품은 미인은 말 앞에서 울었네
(含怨佳人泣馬前)

붉은 말이 정다워 또 길을 안 것인데
(紅鬣有情還識路)

종은 무슨 죄로 공연히 채찍을 맞았나
(蒼頭何罪謾加鞭)

남긴 한 곡조만은 가사가 아름다워
(唯餘一曲歌詞妙)

달과 함께 어울려 영원토록 전해지리
(蟾兔同居萬古傳)


고려 중기 문신 이공승(李公升, 1099~1183)이 쓴 ‘천관사’(天官寺)란 시다. 16세기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려 있다.


김유신·천관녀에 얽힌 창건설화

월정교 남단에서 700m 정도 떨어져 있는 천관사지(사적 제340호)는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김유신과 천관녀에 얽힌 창건설화가 깃든 절터다.

김유신이 젊었을 때 하루는 기생 천관의 집에 머물렀다. 그의 어머니는 김유신과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주야로 너의 성장을 바라보고 있다. 공명을 세워 임금과 어버이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지금 너는 술을 파는 아이와 함께 유희를 즐기며 술자리를 벌이고 있구나”라고 하면서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김유신은 어머니의 훈계를 듣고는 다신 그러한 일이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하루는 피로에 지쳐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말은 옛길을 따라서 잘못하여 천관의 집에 이르고 말았다.

김유신은 이미 깨우친 바가 있어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을 버린 채 집에 돌아갔다. 이 광경을 본 천관은 유신을 원망하는 노래를 한 곡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훗날 천관이 죽자 유신이 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 집 자리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따서 천관사라고 했다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 이야기는 정작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엔 기록된 바가 없다는 점이다.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로 이어지면서 사람들에게 회자되던 이 이야기를 설화 형식으로 엮어낸 사람은 고려 중기의 문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였다. 이 이야기는 이인로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쓴 책 ‘파한집’(破閑集)에 처음 등장한다.

앞서 언급한 이공승의 시 역시 김유신과 천관녀에 얽힌 창건설화를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런 점으로 미뤄 천관사 창건에 얽힌 김유신과 천관녀의 이야기는 고려 전기에도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몸돌과 지붕돌이 팔각으로 이형탑 모습을 보이고 있는 천관사지삼층석탑.

국가 주요사찰 추정…고려 때까지 명맥 유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보니 천관사의 연혁은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엔 천관사나 천관녀는 나오지 않지만 ‘천관신’(天官神)이란 말은 등장한다. 건복 29년(612)에 이웃 적병(敵兵)이 점점 박도(迫到)하니, 공(김유신)은 더욱 비장한 마음을 격동하여, 혼자서 보검을 들고 인박산(咽薄山) 깊은 골짜기 속에 들어가서, 향을 피우며 하늘에 고하고 기원하기를 마치 중악(中嶽)에서 맹세하듯이 빌었더니, 천관신(天官神)이 빛을 내려 보검(寶劍)에 영기(靈氣)를 주었다는 내용이다.


김유신이 태어난 해가 진평왕 건복 12년(서기 595)이므로, 건복 29년이면 그의 나이 18세 때였다. 인박산은 젊은 시절 김유신이 무술을 닦던 곳으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경주 부근일 가능성이 크다. 천관신이 빛을 내려 보검에 영기를 주었다는 것은 상징적인 표현일 터. 이는 곧 김유신이 산에서 무술을 닦던 중 천관녀를 만난 것으로 유추해볼 수도 있다.

‘삼국유사’엔 신라 하대 천관사의 위상을 추정해볼 만한 내용이 등장한다. 바로 신라 제38대 원성왕 김경신(金敬信)이 천관사 우물로 들어가는 꿈을 꾼 후 왕위에 등극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근거로 김유신이 천관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천관사를 세웠다는 속설은 문헌에 직접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아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멀고, 원성왕을 전후한 시기에 왕실과 관련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던 사찰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다. 천관사가 천운을 살펴 정치적 자문을 하던 기관이거나 국가가 주관한 제사를 거행하던 사원에 가깝다는 것이다.

게다가 천관(天官)이란 이름이 기녀와는 맞지 않으며, 그 실체는 창기가 아니라 여제사장이라는 견해도 있다. 천관은 하늘의 별자리를 관찰하여 천운을 살피고 제사를 주관하던 여사제(女司祭)일 가능성이 있으며, 따라서 천관사의 성격은 바로 천관에 의해 국가차원의 제사가 거행되던 중요한 사찰이었다는 주장이다.

어찌됐던 천관사는 고려시대에도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이공승, 이규보(李奎報) 등이 천관사를 방문하고 시를 지은 것을 보면,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된 1530년(조선 중종 25) 이전 어느 시점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게 경주문화재연구소 측 설명이다.



독특한 형태 삼층석탑 눈길

이 절터는 ‘오릉 동쪽에 있다’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기록과, 그 부근의 전답 사이에서 무너진 탑 부재와 주춧돌 등이 확인돼 천관사 터로 추정됐다. 이곳에선 팔부신중상(八部神重像)과 ‘습비’(習比)명 수키와, ‘대태각’(大太角)이 새겨진 석편(石片)이 출토됐다. 그밖에도 건물의 부재로 사용됐던 많은 주춧돌과 각종 석재가 인근 마을 가옥에서 발견됐다고 한다.

2000~2001년엔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여 탑 터와 건물터, 문 터, 석등 터, 동서 및 남북의 축대, 담장, 우물 등을 확인하고, 금동불상과 ‘천’(天)명 수키와 등 520여점의 유물을 수습했다.

2010~2011년 조사에선 물을 저장한 시설과 담장 등 5~8세기에 해당하는 여러 구조물을 확인했다. 2012~2013년엔 (재)신라문화유산연구원이 발굴조사를 벌여 건물 터와 연못 터, 청동공방 터 등 다양한 성격의 유구와 유물을 확인했다.

이를 통해 천관사의 사역 범위와 성격이 좀 더 분명해졌다. 중문(中門)이 서쪽에 있고 그 동쪽에 석탑과 금당 터가 배치되며, 금당 터의 북쪽에 강당 터가 위치하는 독특한 형식을 지녔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이러한 가람배치의 특징은 지형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찰이 처음부터 계획에 따라 조성된 것이 아니라 민간주택 등 기존 건축물에서 절로 바뀐 상황을 보여준다는 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측 설명이다.

경주시는 최근 천관사 터를 깔끔하게 정비하고 흩어져 있던 탑 부재를 활용해 삼층석탑을 추정 복원했다. 천관사지삼층석탑
은 몸돌과 지붕돌이 팔각형으로, 경주지역에서는 유일한 형식이다.


김운 역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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