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고향 경주라면 책방거리 하나쯤 있어야지요!”

국학자료원 정찬용 원장의 45년, 책 나눔 통한 문화사랑

박근영 기자 / 2023년 06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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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추보호대를 두른 채 작업 중인 정찬용 원장.

2022년 7월 모펀카페라는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사과문에서 ‘심심한 사과’가 문제시되며 MZ세대의 낮은 문해력(文解力)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이것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책읽기에 소홀한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단편적인 예다.

 말이나 문장 구조상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는 우리나라 국민들은 말과 글 속에 들어 있는 한자를 쉽게 사용하고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데 한문 교육이 소홀해지면서 문해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여기에 책이나 신문을 통해 정보를 얻던 과거와 달리 대부분의 정보를 유튜버 같은 동영상에서 얻는 세대의 문해력은 갈수록 낮아지는 추세다.

↑↑ 용인특례시에 도서 기증 후 이상일 시장과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정찬용 원장.


수많은 지자체와 대학, 군사학교까지 귀중한 책 기증. 국가문화발전에 큰 기여. 100% 헌책 아닌 완전한 새 책들!!

국학(國學)과 관련한 가장 많은 책을 기획하고 출판한 대표적인 출판사인 ‘국학자료원’ 정찬용 원장은 낮아진 국민의 문해력을 회복하는 길은 독서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바로 그런 사명과 책을 통한 지역문화 발전이라는 숙제를 안고 정 원장은 우리나라의 많은 문화단체와 지자체들에게 국학자료원의 책을 보급하는 일을 오랫동안 이끌어 왔다. 

올해만 해도 양주시의 인문 독서문화발전을 위해 학술도서 5000권을 기증한 것을 시작으로 안산시에도 문화진흥과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한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5000권을 기증했고 수원시 5000권, 화성시에 6000권을 기증한 것에 이어 안산시와 안양시, 연천군, 이천시, 하남시, 태백시와도 순차적으로 도서 기증 및 문화발전에 관한 협약을 맺었다. 특히 이번 5월에도 지난 9일 용인특례시와 독서문화 진흥협약을 맺고 우수도서 5000권을 기증했고 26일에는 서울시 마포구에 2101권의 도서를 기증하며 독서문화조성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5월 30일에는 양평군과도 같은 목적으로 업무협약을 맺고 도서를 기증했다. 이 밖에도 지난해까지 여주시, 부경대, 무주군, 군산시, 고려사이버대, 임실군 등 많은 지자체와 대학들이 국학자료원의 도서를 기증받아 문화발전과 독서문화 정착의 발판을 마련했고 심지어 공군사관학교와 육군삼사관학교도 국학자료원의 책을 받아 진일보한 군대문화의 기반을 조성했다.

↑↑ 창고에서 또 다른 인연을 기다리는 국학자료원의 귀한 책들

지난 5월 5일 도서기증을 약속한 지자체로 책을 보내기 위해 한창 작업 중인 정찬용 원장을 만났다. 100여평의 넓은 부지에 3층 철골 구조로 만든 창고에는 지금까지 국학자료원이 발간한 1500여 종 50만 권의 책들이 골판지 박스에 넣어져 보관되고 있었다. 골판지 박스에 책을 보관하는 이유는 골판지가 습도를 조절해 책이 아무리 오래 지나도 책장이 바스러지거나 상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실제로 어느 골판지 박스에서 꺼낸 발간한 지 20년 지난 책이 마치 새 책처럼 완전하고 깔끔하게 보관되어 있었다.

“제가 책을 기증한다고 하니까 혹여라도 오래된 헌책을 주는 것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십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책은 완벽한 새 책입니다. 그래서 책을 받는 지자체나 학교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마침 정찬용 원장은 작업복 차림으로 손수 3층 도서 진열대를 오르내리며 책을 고르고 있었다. 허리에는 헬스클럽에서 고중량을 들 때 착용하는 튼튼한 가죽 벨트와 혹시라도 낙상사고를 대비, 척추를 보호할 의료용 척추 보호대까지 두르고 있다. 평생 대한민국 역사와 문화를 아우른 5300여종의 책을 출판한 국내 최대 규모의 출판사인 국학자료원과 ‘새미’, ‘북치는 마을’, ‘L.I.E’ 등 유력한 자매 출판사들을 이끌어 온 출판그룹 회장이라기보다는 단지 책을 옮기고 나르는 인부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찬용 원장은 그런 모습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오히려 당당하고 의연한 표정이다.

“여기 있는 책들은 우리 국학자료원의 오랜 기록이자 저에게는 영구히 남길 후손 같은 책입니다. 이 소중한 책이 좋은 곳으로 옮겨가는데 마땅히 제 손으로 보내야지요”

정찬용 원장이 책과 맺은 인연은 1976년, 무려 4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가 서울에 처음 와서 ‘평화출판사’란 곳에서 책 파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걸 6개월 쯤하고 나니 책 판매에서 탑(Top)을 기록했어요. 그 모습을 유심히 보신 분이 ‘아시아문화사’란 곳에 소개해 거기서 2년 정도 근무하며 책에 관해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그런 후에 우리나라의 장기적인 출판시장에서 ‘국학’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학자료원’을 만든 겁니다”


↑↑ 수원시에 도서기증 후 업무협약을 맺은 정찬용 원장


국내와 세계 주요 도서관에 ‘대한민국 국학’ 비치한 대표 출판사, 인문학 발전과 21세기 실용문화에도 큰 기여!!

출판업계에서 국학자료원의 위치는 그 이름에 걸맞을 만큼 눈부시다. 국학자료원은 크게 8가지 큰 카테고리에서 책을 펴내 왔다. 현대문학, 고전문학, 한국사, 국어학, 영문학, 편집영인본, 대중문학, 전집 사전류가 그 중요한 카페고리다. 특히 정찬용 원장은 고전문학과 국어학 같은 출판사로서는 영업이 잘 안되는 분야에서 많은 책을 펴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 문화 발전의 근간이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그런 책들은 일반인들에겐 읽히지 않지만 학문을 연구하는 대학에서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 책들로 인해 우리나라 인문학이 넓어지고 깊어지거든요. 그러다 보니 어지간한 대학교 교수님들은 제가 다 만나고 다녔어요. 그분들이 책을 펴낸 저에게 고마워하기도 하고 제가 불시에 찾아가 비싼 책들을 사라고 권해서 부담도 많이 느꼈던 분들입니다”

일반대중이 읽기 힘든 비인기 종목의 연구서들을 발간하면서도 출판사를 유지하기 위한 방책으로 정찬용 원장은 자신의 탁월한 판매력을 손꼽았다. 그 판매력은 책을 억지로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연구서를 제작해 더 필요한 곳에 정확하게 보급하는 인문학적 지식과 오랫동안 진심으로 맺어온 학문적 인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대한민국 인문학 발전에 대한 정찬용 원장의 집념은 국학자료원의 책이 국내 주요 도서관에 비치된 것은 물론 세계 유수의 도서관에 집중적으로 보급된 것에서 큰 결실을 맺었다.

“저희 책이 전 세계 주요 도서관에 안 간 곳이 없어요. 각국 국립도서관과 명문대학 도서관 한국학 관련 서가에 저희 책이 빠질 수 없지요. 그게 제가 출판업하면서 가지는 가장 큰 자부심입니다”

↑↑ 육군삼사관학교와 도서기증 후 업무협약 맺은 정찬용 원장

그런 만큼 정찬용 원장은 우리나라 인문학 발전을 위한 투자에도 누구보다 앞장서 온 선구자다. 단적인 예로 ‘조선시대생진시방목(전28권)’ 같은 책은 발간을 위해 출판사로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의 큰 비용을 투자한 책들이다. 이 책은 조선시대 진사, 초시, 생원 시험에 합격한 선비들의 명단이다. 더구나 이 책에는 당시의 시험문제, 그 합격자 집안의 내력까지 들어 있어 조선시대 문반 가문에 대한 전체 자료를 모아놓은 중요한 자료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조선의 공식저술과 각 집안의 자료까지 일일이 모으는 길고 힘든 노력이 들었다. 이런 책이 한두 종이 아니고 국학자료원에서 발간한 많은 책들이 이런 피땀의 산물이다.

책을 어렵게 만든 만큼 국학자료원의 책은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판매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장 비싼 책은 470만원의 고가에 판매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가진 가치는 470만원으로는 계산하기 힘든 가치를 가지고 있음을 말할 필요도 없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더 높아지는 것 역시 특징이다.

그런가 하면 워낙 방대한 국학 자료를 다루다 보니 영화나 드라마 제작의 자료로도 많은 책들이 사용되기도 했다. 각종 사극과 전설, 설화 관련 영화나 드라마들을 만드는 기본 자료로서 국학자료원의 책들이 꾸준히 인용되어 온 것이다.

“재미있는 게 있어요. 여름철 납량특집으로 인기 높은 귀신 소재 드라마 담당 피디나 작가들이 자료를 얻기 위해 저에게 도움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이처럼 국학자료원의 책들은 단순히 지식저장의 용도에서 그치지 않고 21세기 대한민국 실용문화 성장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온 보물들인 셈이다.

그런 정찬용 원장이기에 누구보다 책을 소홀히 하는 근래의 습성들이 안타깝다. 책 읽기가 등한시되고 그 자리를 스마트폰과 컴퓨터 영상매체가 대신하는 것이 시대적인 흐름이라고 하지만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영감과 책읽기를 통해 각인되는 기억들의 소중함은 전혀 다르다고 강조한다.

“책은 가장 현실적으로 정보와 지식을 보존할 수 있으며 책을 통해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양한 창작을 가능하게 하는 확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을 넘기는 질감 역시 E북과 확연히 다릅니다. 절대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한편 정찬용 원장은 경주시립도서관에도 국학자료원의 책들이 많이 비치되어 있어서 자주 경주를 찾았다고 회고한다. 정찬용 원장은 경주가 우리나라 인문학의 뿌리인 만큼 경주에 인문학 관련 도서관이나 책방거리가 생긴다면 기꺼이 책들을 기증하겠다고 약속한다.

마침 최근 들어 제주도에서 헌책방거리가 인기를 얻고 있고 관광 관련 비중이 높은 지자체들이 앞다투어 책을 테마로 한 카페거리 조성에 박차를 가하는 등 책을 다시 조명하는 사례가 급속히 늘고 있다. 국학자료원의 책이 최근 많은 지자체들의 요청으로 꾸준하게 보급되고 국학자료원과 문화발전에 관련된 협약이 늘어난 것은 각 지역 문화발전에서 차지하는 책에 대한 욕구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경주에 책을 통한 문화발전, 책을 통한 보다 차원 높은 관광과 시민문화가 펼쳐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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